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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화 지명의 유래 &#8211; :: 강화로닷컴(행사대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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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행사용품 렌탈대여 행사대행</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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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화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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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6:23:31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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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강화읍은 고려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천도 한후 강도의 소재지였으며 1377년(우왕 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 부치(府治)가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이래 부내면(府內面)이라 칭하다가 1938년 강화군의 이름을 따라 강화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7월 1일 강화읍으로 승격되었다. 강화는 강과 연관된 지명으로 강(한강, 임진, 예성)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 강하(江下)라 부르다가 강아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으로 강화(江華)로 개명한 듯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강화읍은 고려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천도 한후 강도의 소재지였으며 1377년(우왕 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 부치(府治)가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이래 부내면(府內面)이라 칭하다가 1938년 강화군의 이름을 따라 강화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7월 1일 강화읍으로 승격되었다.</p>
<p>강화는 강과 연관된 지명으로 강(한강, 임진, 예성)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 강하(江下)라 부르다가 강아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으로 강화(江華)로 개명한 듯 하다.</p>
<h4><strong>신문리(新門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래의 부내면의 구촌동(舊村洞), 신촌동(新村洞)에 홍문동(紅門洞)과 종각동(鐘閣洞), 남산동(南山洞), 국정동(國淨洞) 각 일부를 합하고 신촌동에서 신(新)자와 홍문동에서 문(門)자를 따서 신문리라 칭하였다.</p>
<p><strong>남문안(南門內)</strong> : 강화산성의 남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남문안이라 부른다.</p>
<p><strong>남산(南山)</strong> : 강화부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남산으로 부르고 있다.</p>
<p><strong>남산골(南山谷)</strong> : 남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남산골이라 부른다.</p>
<p><strong>댕댕이</strong> : 옛부터 댕대이 고개가 이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댕댕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1788년에 세운 대흥정(大興亭)이란 정자가 있던 마을이라 대흥이라 부르기도 한다.</p>
<p><strong>잠두(蠶頭)</strong> : 뒷 남산골 동쪽에 있는 누에머리처럼 생긴 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라 잠두라고 부른다.</p>
<h4><strong>관청리(官廳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 개편할 때 종래의 관청하동(官廳下洞) 부사후동(府司後洞) 동문동(東門洞), 서문동(西門洞), 숙곶동(?串洞)과 홍문동(紅門洞), 종각동(鐘閣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조성되었으며 옛부터 각종 관청이 소재하고 있어 관청리라 하였다.</p>
<p><strong>견자산(見子山)</strong> : 살채이 북쪽에 있는 산으로 고려 고종이 몽골에 인질로 간 왕자 를 생각하고 자주 이 산에 올라 북녘을 바라보며 아들을 그리워하였다고 하여 견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정자산이라고도 한다.</p>
<p><strong>궁골(宮谷)</strong> : 서문안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수진궁이 이곳에 있어 궁골이라 부른다.</p>
<p><strong>내수골(內需谷)</strong> : 동문안 서남쪽 내수사가 있던 마을이라 내수골이라 부르며 내수사는 대궐에서 쓰는 쌀, 베, 잡물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이다. 현재 경찰서 서편 용흥궁 주변지역이라고 한다.</p>
<p><strong>동문안(東門內)</strong> : 강화산성 동문이 있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동락천(東洛川)</strong> : 시냇물이 강화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는 내라 동락천이라 한다.</p>
<p><strong>북문고개(北門峴)</strong> : 1677년에 축조한 강화산성의 북문이 있는 고개마루라 북문고개라 부르며 대산리와 신당리를 왕래하는 길목이다.</p>
<p><strong>북문안(北門內)</strong> : 향교골 동쪽 강화산성 북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북문안이라 부른다.</p>
<p><strong>살채이</strong> : 내수골 동남쪽 견자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1389년(공양왕 1) 12월 이성계가 고려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죽였다하여 살창이라 부르다가 살채이로 변하였다.</p>
<p><strong>서문안(西門內)</strong> : 강화산성 서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인 이름이다.</p>
<p><strong>성마루(城峴)</strong> : 동문안 북쪽 마루터기 강화성공회가 있는 위쪽 마을로 조선전기에 쌓은 강화내성이 있어 성마루라 부른다.</p>
<p><strong>토끼다리(兎橋)</strong> : 살채이 동남쪽 동락천에 있던 다리로 양쪽에 토끼 모양의 돌이 있어 토끼다리라고 하였다.</p>
<p><strong>왕자정(王子井)</strong> : 관청리 산16번지 고려궁지 서편골에 있는 우물로 고려때 궁중에서 먹던 우물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운수물</strong> : 강화향교 서쪽에 있는 우물로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운수물이라 부르는데 운수물에서 유래된 듯 하며 향교에 제사 지낼 때 이 물을 썼다고 한다.</p>
<p><strong>향교골(鄕校谷)</strong> : 생굣골, 생굣굴, 향교곡이라 불리운다. 궁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강화 향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국화리(菊花里)</strong></h4>
<p>본래 부내면 지역으로 이곳에 산천이 아름다운 국정동천(國淨洞天)이 있어 국정동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국정동과 자연마을인 연화골(蓮花谷)에서 한글자씩 따서 음만 같은 국화리(菊花里)로 명명하였다고 하며 나라 국(國)자를 국화 국(菊)자로 고친 것은 꽃화자에 어울리는 말을 찾아 국(菊)자로 표기한 듯 하다.</p>
<p><strong>국정(國淨)</strong> : 예전에 이곳에 산천이 아름다운 국정동천이 있는 마을이라 국정이라 부르고 있다.</p>
<p><strong>고려산</strong> : 오련지 옛날 고려산 정상에 연못이 있어 다섯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 오련지라 불렀다고하며 고구려 416년(장수왕 4) 천축조사가 이곳 연못에서 핀 백련, 청련, 적련, 황련, 흑련 등 다섯가지 연꽃을 날려 떨어진 자리에 연꽃색깔로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적석사), 황련사(폐사, 연화동천), 흑련사(폐사, 혈구산 서영 석굴 부근)를 지었다는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p>
<p><strong>마지터</strong> : 지방돌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교동원(喬桐員)이 부임할 때 아전들이 이곳까지 와서 맞이하였다고 하여 마지터라 부른다.</p>
<p><strong>서문밖(西門外)</strong> : 강화산성 서문 밖에 위치한 마을이라 붙인 이름이다.</p>
<p><strong>연지(蓮地)</strong> : 국정 동쪽 연화동천이란 경치가 아름다운 골짜기 인근에 있는 마을이라 연지라고 칭하였으며 연화골이라고도 부른다. 지(地)는 지(池)의 오기인 듯 하다. 지방돌 : 이 마을은 고려 고종때 쌓은 강화중성인 토성이 북산에서 승거문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성의 경계 및 내역을 돌에 새겨놓은 큰 지석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진고개</strong> : 지방돌과 서문사이에 있는 고개로 긴고개가 변하여 진고개로 부른 듯 하며 그곳에 있는 마을을 칭하기도 한다.</p>
<h4><strong>남산리(南山里)</strong></h4>
<p>본래 부내면 지역으로 강화산성 남문밖에서 부조개를 거쳐 선행리 북편 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남산리라고 칭한다.</p>
<p><strong>남궁촌(南宮村)</strong> : 부조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함열 남궁씨들이 집단으로 세거해온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남문밖(南門外)</strong> : 강화산성 남문 밖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 남문밖이라 부른다.</p>
<p><strong>문촌말</strong> : 부조고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문씨가 많이 살아 문촌말이라 부르며, 문사촌으로도 칭한다.</p>
<p><strong>부조고개(扶助峴)</strong> : 남문밖 남쪽에 있는 고개로 고려의 옛신하들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새 정부에 불복하고 이 고개에서 다시는 벼슬하지 않기로 맹서하고 구신골(舊臣谷)로 들어가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으며, 처음에는 부조현(不朝峴)이라 하였는데 뒤에 음만 같은 부조현(扶助峴)으로 표기하고 있다.</p>
<p><strong>화성촌(和成村)</strong> : 남산 뒷편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0년에 마을을 좀더 잘살게 하기 위하여 양계와 축산을 장려하고 생활향상을 도모하여 상, 하 마을이 화합하자는 취지에서 화성 4-H 구락부를 조직 운영 한데서 화성촌으로 부르게 되었다.</p>
<h4><strong>갑곶리(甲串里)</strong></h4>
<p>본래 장령면 지역으로 강화의 옛 이름인 갑비고차(甲比古次)가 변하여 갑고지 가 갑곶동이 되었다고 전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동, 만수동, 묵사동의 각 일부와 부내면의 숙곶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갑곶리가 되었다.</p>
<p><strong>만수동(萬壽洞)</strong> : 지금의 당산을 만수산이라고도 부르며 그 아래있는 마을이라 불러온 이름이다.</p>
<p><strong>먹절</strong> : 갑곶진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 이곳에 묵왕사(墨王寺)란 절이 있어 묵사동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우리말로 풀어서 먹절로 부른다.</p>
<p><strong>알미</strong> : 강화읍 동쪽에 조산(造山)이 있고 조산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하여 알뫼로 부르다가 알미로 변하였다고 한다.</p>
<p><strong>장동(長洞)</strong> : 강화읍내에서 강화대교 방향으로 그리 높지 않은 등성마루에 자리잡은 긴 마을이라 장동이라 한다.</p>
<p><strong>진해부락(鎭海部落)</strong> : 당산 동쪽 옛날 진해사란 절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진해부락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그곳은 폐동되고 갑곶 구 강화대교 서편마을을 가리킨다.</p>
<h4><strong>용정리(龍井里)</strong></h4>
<p>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예전에 이곳에 용이 승천한 우물이 있다고하여 용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용정리라 하였다.</p>
<p><strong>망월(望月)</strong> : 양릉 서남쪽에 달맞이 하기가 좋은 등성이가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 달을 보았다고 하며, 그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범우리</strong> : 용구물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말 충신 간의대부 범세동(范世東)이 나라의 운명이 다한 것을 보고 이곳에 숨어 후진양성을 하며 여생을 보낸곳이라 하여 범은리(范隱里)라 부르다가 와전되어 범우리가 되었다고하며 일설에는 범옹리(范翁里)가 범어리로 변하였다고도 한다.</p>
<p><strong>양릉(陽陵)</strong> : 고려시대 이 마을에 양릉이란 능이 있었다는데서 유래되었으나 문헌상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p>
<p><strong>양호(陽虎)</strong> : 이 마을에 양릉과 호두산이 있어 머리 글짜를 따서 양호부락이라 부르고 있다.</p>
<p><strong>용구물</strong> : 호두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우물이 있어 용구물이라 부르며 일설에는 마을안의 산이 용의 궁처럼 생겼다하여 용궁물이라 하였으나 와전되어 용구물로 칭한다고도 한다. 진장바위 : 부새산 동북쪽 바닷가에 있는 바위로 김장때가 되면 마을 여러 부녀자들이 모여 김장거리를 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옥림리(玉林里)</strong></h4>
<p>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고려때 사찰 왕림사(旺林寺)가 있어 왕림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장승동(長承洞), 왕림동과 옥포동(玉浦洞)의 일부 지역을 합하고 옥포와 왕림에서 한글자씩 따서 옥림리라 하였다.</p>
<p><strong>도감골(都監谷)</strong> : 옥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곳에 도감이 설치되어 있었다하여 도감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일설에는 도감이란 무과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아서 도감골이라 칭한다고도 한다.</p>
<p><strong>사왕골(四王谷)</strong> : 신왕 서북쪽 북산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사왕사가 있던 곳이라하여 사왕골이라 부른다.</p>
<p><strong>신왕(新旺)</strong> : 왕리물 서남쪽 길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왕 또는 새말이라 부른다.</p>
<p><strong>왕리물</strong> : 장승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왕림사가 있던 마을이라 왕리물이라 하였으며 왕림말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연비고개(燕飛峴)</strong> : 도감골과 장승말 사이에 있는 고개로 뫼뿌리와 고개형상이 제비가 나는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옥포(玉浦)</strong> : 바다물이 돌아 흘러가는 모양을 한 개의 포가 있는 마을이라 옥개라 부른다.</p>
<p><strong>자문이고개(紫門峴)</strong> : 도감골과 옥개사이에 있는 고개로 고려 중성의 북동문인 창희문(彰熙門) 일명 자문(紫門)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장승(長承)말</strong> : 도감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 마을에 장승이 있어 장승말이라고 하였으며 장승배기라고도 부른다.</p>
<p><strong>할미산</strong> : 옥개 뒤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학의 꼬리와 비슷하다고하여 학미산(鶴尾山)이라 하였는데 와전되어 할미산이 부른다고 하며 일설에는 할미등처럼 생긴산이라 할미산이라 칭하기도 한다.</p>
<h4><strong>월곶리(月串里)</strong></h4>
<p>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연미정(燕尾亭)이 있어 연미동이라 하였는데 달뜨는 모습을 이곳 연미정에서 보는 것이 매우 아름다워 달곶 즉 월곶이라 부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고성동(高城洞)과 옥포동(玉浦洞)의 각 일부 지역을 합하여 월곶리라 하였다.</p>
<p><strong>고성동(高城洞)</strong> : 월곶 서북쪽 해안선을 끼고 있는 마을로 고려시대 외성을 쌓을때 이곳 지역을 높게 쌓았다하여 고성동이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동학골(東學谷)</strong> : 대묘골의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동학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p>
<p><strong>뺄우물(星井)</strong> : 대묘골 서남쪽에 있는 약수로 풍병에 효과가 있다고하며 예전에 이곳에 별이 떨어진 자리에 샘이 생겨 우물이 되었다하여 별우물(星井)이라 부르다가 뺄우물로 변하였다.</p>
<p><strong>연미정(燕尾亭)</strong> : 월곶 동쪽 바닷가 낮은 산위에 있는 정자로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가 이곳에 이르러 양쪽으로 갈라져 서해와 염하가 되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월호(月湖)</strong> : 월곶리 연미정 아래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둥근달과 비슷하고 호수에 면하고 있어 월호라 칭하였다고 한다.</p>
<h4><strong>대산리(大山里)</strong></h4>
<p>원래 장령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묘동(大廟洞)과 소산동(小山洞)에 송정면의 신성동(申城洞) 일부지역을 합하고 대묘동과 소산동에서 한글자씩 따서 대산리라 하였다.</p>
<p><strong>납성개</strong> : 신성포를 한글로 표기한 지명으로 돌모루 서쪽 벌판에 있었던 마을 또는 개이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이주하여 폐동되었다.</p>
<p><strong>대묘동(大廟洞)</strong> : 고려 고종때 이마을에 대관전 신격전의 두 태묘가 있었다하여 태묘로 부르다가 후에 대묘로 바뀐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돌모루</strong> : 소산이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은 모퉁이라 돌모루라 칭한다.</p>
<p><strong>석신(石新)</strong>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석우(石隅)와 신성(申城)의 두 마을을 합하여 지은 지명으로 신성의 납신(申)자를 새신(新)자로 음만 따서 표기하고 있다.</p>
<p><strong>소산동(小山洞)</strong> : 대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작은 산들이 있는 마을이라 소산동으로 칭하며 소산이라고도 한다.</p>
<p><strong>송악골(松岳谷)</strong> : 소산이 서남쪽 송악산 즉, 북산밑 골에 있는 마을이라 송악골이라 부른다.</p>
<p><strong>오읍약수(五泣藥水)</strong> :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 동쪽 북산 골짜기에 있으며 고려 고종이 강화천도후 내성을 수축할 때 장정들이 목이 말라 애타고 있을 때 갑자기 청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금의 약수터위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솟아 역군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하며 오읍은 몽골침입 때에 피해온 실향민들의 향수를 그려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이 울었는가하면 황제가 울고 온 백성이 울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청송부락(靑松部落)</strong> : 북산 너머에 있는 청디물과 송악골을 아울러 이르는 지명으로 산에 노송(老松) 등이 무성한 골에 있는 마을이라 청송부락이라 칭하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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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원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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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6:07:37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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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고려 고종때 전국 2대 사찰의 하나인 선원사(禪源寺)가 이곳에 있었다하여 선원면(禪源面)으로 호칭하였고 조선 인조 이후부터 선원면(仙源面)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선원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 즉 이상향이란 좋은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월리(錦月里) 옛부터 거말동(巨末洞)이라 하였으며 거말동을 대촌(大村)이라 부르기도 하 는데 이 명칭은 큰말이란 뜻으로 속칭 금월어지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 다. 개골동능소(蓋骨洞陵所)터 : 대문고개 서남편 야산 개골동에 있는 고려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고려 고종때 전국 2대 사찰의 하나인 선원사(禪源寺)가 이곳에 있었다하여 선원면(禪源面)으로 호칭하였고 조선 인조 이후부터 선원면(仙源面)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선원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 즉 이상향이란 좋은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p>
<h4><strong>금월리(錦月里)</strong></h4>
<p>옛부터 거말동(巨末洞)이라 하였으며 거말동을 대촌(大村)이라 부르기도 하 는데 이 명칭은 큰말이란 뜻으로 속칭 금월어지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 다.</p>
<p><strong>개골동능소(蓋骨洞陵所)터</strong> : 대문고개 서남편 야산 개골동에 있는 고려 태조와 세조의 두 능침(陵寢)을 1243년(고종 30)에 이곳에 옮겼던 터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능묘는 1276년 승천부로 이장되었다.</p>
<p><strong>기세미</strong> : 금월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세갈래로 길이 나서 길삼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기새미라고 부르고 있으며 뒷산이 갈지산(葛芝山)으로 갈지산의 지자와 동녘, 양지, 가운데 마을의 삼(三)자를 따서 지삼촌으로도 부른다.</p>
<p><strong>대문이</strong> : 금월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고종이 천도후 이 고개위에 중성의 남문인 태안문(泰安門)이란 큰문을 세웠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대문촌이라고도 한다.</p>
<p><strong>대촌(大村)</strong> : 금월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큰말이라 불렀으며 큰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p>
<p><strong>영골(永谷)</strong> : 옛부터 골짜기가 긴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영골이라 칭하였으며 대영촌이라고도 한다.</p>
<h4>
<strong>연리(烟里)</strong></h4>
<p>예전에 이마을 북동편에 와야촌(瓦冶村)이 있어 기와를 구워 마을에 항상 연기가 자욱하여 연동(烟洞)이라고 하였으며 일설에는 이 마을에 연꽃이 많이 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에 물이 풍부해 때때로 수증기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연동으로 칭한다고도 한다.</p>
<p><strong>고잔(串內)</strong> : 능골 동편에 있는 골짜기로 산줄기가 바다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곶의 안에 있는 골이라 고잔이라 한다.</p>
<p><strong>능곡촌(陵谷村)</strong> : 고려 고종의 가릉(假陵)이 있던 마을이라 능곡촌이라 부른다.</p>
<p><strong>연화촌(蓮花村)</strong> : 예전에 연리와 금월리의 접경에 연꽃이 많이 피는 연못이 있어 연화촌이라 칭한다.</p>
<p><strong>용진촌(龍津村)</strong> : 1656년(효종 7)에 설치한 용진진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유래되었다.</p>
<h4>
<strong>지산리(智山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래의 신지동(神智洞)과 남산동(南山洞)을 합하고 신지에서 지(智)자와 남산에서 산(山)자를 따서 지산리라 칭하였다.</p>
<p><strong>남산촌(南山村)</strong> : 옛날 신지촌 남쪽 산자락에 남산대가 있던 마을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p>
<p><strong>독제이</strong> : 예전에 이곳에서 도기를 만들었다고 하여 독점마을이라 부르다가 독제이로 변하였으며 일설에는 왜말 동쪽에 독점이 있는 마을로 인조때 이곳에 도촌(陶村) 정유성이 살았다고하며 그가 문과에 올라 우의정에 이르러 현달하자 뒷산이름을 독정산이라 부르고 그아래 마을를 독정촌이라 한 이후부터 독제이로 부른다고도 한다.</p>
<p><strong>신지촌(神智村)</strong> : 지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에 이곳 마을 뒷산 사찰에 신지라는 고승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을 따라 신지촌이라 부른다고 전한다.</p>
<p><strong>와야촌(瓦冶村)</strong> : 신지촌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영조때 강화 동쪽 해변에 장성을 개축할 때 그곳에 필요한 벽돌을 굽던곳이라 와야촌이라 하였으며 속칭 왜말로 부르고 있다.</p>
<h4>
<strong>신정리(神井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신당동(神堂洞)에 이정동(梨井洞) 일부와 옛 장령면 갑곶동(甲串洞) 일부를 합하고 신당동에서 신(神)자와 이정동에서 정(井)자를 따서 신정리라 하였다.</p>
<p><strong>가자촌</strong> : 도감 동북쪽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가재가 많아 가재골이라 하다가 변하여 가자골로 부른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더리미(加里尾)</strong> : 옛날에 이마을 뒤 언덕에 가리정이란 정자가 있어 더할가(加)자를 더로 풀어서 더리미라고 부른다.</p>
<p><strong>도감(都監)</strong> : 더리미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훈련도감이 있던 곳으로 도감이라 한다.</p>
<p><strong>신당촌(神堂村)</strong> : 더리미 위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뒤에 신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신데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유정촌(柳井村)</strong> : 문화 유씨가 많이 사는 마을로 물이 좋고 수량이 풍부한 운수물이란 우물이 있어 유정촌이라 부른다.</p>
<h4>
<strong>창리(倉里)</strong></h4>
<p>이곳은 고려 고종때에 관창지대로 성을 쌓고 방호하던 현당산 창성이 있어 창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창동에 이정동(梨井洞)과 냉정동(冷井洞) 각 일부를 합하고 창리라 부르고 있다.</p>
<p><strong>고식이</strong> : 창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앞 큰 내가 수심이 깊어 다리를 높게 놓아 고수교(高水橋)라 하였는데 후에 변하여 고시기라 부른다고 하며 이정동의 별칭이다.</p>
<p><strong>당후촌(堂後村</strong>) : 마을 뒷산너머에 신당이 있어 신당뒤에 있는 마을이라 당후촌이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이정촌(梨井村</strong>) : 이 마을 가운데 공동우물이 있는데 우물 주변에 배나무가 있어 배나무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이정촌으로 부른다.</p>
<h4>
<strong>선행리(仙杏里)</strong></h4>
<p>산수의 경치가 아름답고 살구꽃이 많이 피는 고장이라하여 신선선(仙)자와 살구행(杏)자를 따서 선행동으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선행동과 증산동(甑山洞)을 합하여 선행리라 하였다.</p>
<p><strong>노적봉(露積峯)</strong> : 선행리 중앙에 있는 산으로 김포쪽에서 보면 그 형상이 마치 노적가리 같아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고려는 위협이 증대하자 고려군은 산 모양을 이용해서 산 전체에 이영을 둘러 군량미를 대량 확보한 것처럼 위장하고 혈구산에서 흐르는 물에 회가루를 풀어 쌀을 씻어서 쌀뜨물이 흐르는 것처럼 위장해 몽골군이 이를보고 위세에 눌려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술감</strong> : 산수가 아름답고 살구꽃이 많이 피는 마을로 양지쪽을 선행촌, 음지쪽을 선화촌이라고 부르며 두 마을을 합하여 술감이라고 하는데 술감은 수암(壽岩)이란 고유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증산촌(甑山村)</strong> : 마을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있어 지형이 시루밑같이 생겼다하여 증산촌이라 칭하며 속칭 시리미라고 부른다.</p>
<p><strong>충렬사(忠列祠)</strong> :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때 순절한 충신 선원 김상용의 집터로 전하는 곳에 1641년 사당을 지어 현충사라 하였다가 1658년 효종께서 충렬사로 사액한데서 유래되었으며 현재 병자호란때 충신 김상용외 26위, 신미양요때 충신 어재연외 1위 등 합29위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다.</p>
<h4>
<strong>냉정리(冷井里)</strong></h4>
<p>이곳에 찬우물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차고 맛이 있어 명정(名井)으로 일컬어 왔으며 또한 이 마을에 수질이 비슷한 옥골물이라는 이름난 우물이 또 있어 찬물이 나는 마을로 상징화되어 냉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냉정동의 일부를 창리로 넘기고 대문동의 일부를 합하여 냉정리라 하였다. 현재 찬우물은 1914년 창리 관할로 변경되었다.</p>
<p><strong>고산촌(高山村)</strong> : 옛 금월동과 냉정동 사이에 있는 지대가 높은 지역에 있는 마을이라 고산촌이라 하였으며 속칭 고새이라고 한다.</p>
<p><strong>교동촌(校洞村)</strong> : 1923년 선원보통학교가 이곳에 세워진 이후 교동촌으로 부르고 있다.</p>
<p><strong>대청뚝(大靑堰)</strong> : 1663년(현종 4) 강화유수 조복양이 축조하였으며 선원면과 불은면 사이를 흐르는 삼동암천이 포구였을 때 이곳을 통하여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였다고 하여 제방 명칭을 대청뚝이라 부른다고 전하고 있다.</p>
<p><strong>물우리</strong> : 고새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 마을 앞에 보(洑)를 막아 물이 풍부해 농사에 걱정이 없어 물우리라 하였다고 하며 자연마을 명칭은 물오리란 뜻의 수부촌(水鳧村)으로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물우리를 한자로 표기할 때 물오리로 알고 수부촌으로 명명한 듯 하다.</p>
<p><strong>울내기</strong> : 찬우물고개 아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 마을에 부자가 살았는데 도둑이 많아 울타리를 네길이나 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울네기가 변하여 울내기로 부르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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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불은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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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5:31:48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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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고려시대 불교가 융성할 때 이곳 고능리에 자은사(慈恩寺)가 있었는데 이절의 이름에서 은자를 따서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지역이란 뜻으로 불은면이라 칭하였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불은면과 인정면을 병합한 후에도 그대로 불은면으로 부르고 있다. 두운리(斗雲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종전 인정면의 두두미동(斗頭尾洞)과 백운동(白雲洞)을 합하여 두운리라 하였다. 경주골 : 옷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정자가 있어 정자골로 부르다가 경주골로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고려시대 불교가 융성할 때 이곳 고능리에 자은사(慈恩寺)가 있었는데 이절의 이름에서 은자를 따서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지역이란 뜻으로 불은면이라 칭하였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불은면과 인정면을 병합한 후에도 그대로 불은면으로 부르고 있다.</p>
<h4><strong>두운리(斗雲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종전 인정면의 두두미동(斗頭尾洞)과 백운동(白雲洞)을 합하여 두운리라 하였다.</p>
<p>경주골 : 옷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정자가 있어 정자골로 부르다가 경주골로 변하였다고하며 일설에는 이 마을에 부자가 있어 구슬기둥으로 집을 꾸몃다고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p>
<p><strong>귀릉골(貴陵谷)</strong> : 옷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능이 있어 귀릉골로 부른다고 한다.</p>
<p>두두미 : 옛날에 도덕군자가 살던 곳이라하여 두도미라 불렀으나 와전되어 두두미라 부르고 있다고 전한다.</p>
<p><strong>목비고개</strong> : 옷골에서 길상면쪽을 향해가는 불은과 길상면의 경계에 있는 긴고개로 옛날에는 길이 좁고 숲이 우거져 산적이 나타나 행인의 재물을 탈취하고 잔악한 행위로 목을 베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백운골(白雲谷)</strong> :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백운거사 이규보가 말년에 우거했던 마을에서 유래되었으며 뱅골로도 부른다.</p>
<p><strong>불당골(佛堂谷)</strong> : 경주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붉은고개</strong> : 두운리에서 선원면쪽으로 왕래하는 고개로 흙빛이 붉어 붙여진 이름으로 홍현(紅峴)이라고도 한다. 옷골(衣谷) : 두두미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까마귀가 많이 모이는 곳이라하여 오골(烏谷)이라 부르다가 와전되어 옷골로 부른다고 한다.</p>
<h4><strong>고능리(高陵里)</strong></h4>
<p>종래 불은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고잔동(高盞洞), 능촌동(陵村洞), 곶내동(串乃洞)을 폐합하고 고잔동에서 고(高)자와 능촌동에서 능(陵)자를 따서 고능리라 하였다.</p>
<p><strong>고잔(高盞)</strong> : 지레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언덕이 높아 사람들이 언덕위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경관에 취해 술잔을 주고 받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p>
<p><strong>능촌(陵村)</strong> : 예전에 이 마을에 능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능내촌으로도 부른다.</p>
<p><strong>법당골(法堂谷)</strong> : 능촌 뒤에 있는 골짜기로 고려시대 자은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아침가리</strong> : 지레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사람들이 부지런하여 아침일찍부터 농경일을 열심히 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조경촌(朝耕村)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지레(芝涯)</strong> : 능촌 동편에 있는 마을로 염하와 육지가 연접한 고장으로 떼풀이 무성한 벌땅이라는 뜻에서 지레라고 한다.</p>
<h4><strong>오두리(鰲頭里)</strong></h4>
<p>마을 지형이 마치 자라의 머리처럼 좁고 길게 뻗어나간 곶이 있어 오두동이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오두리라 하였으며 일설에는 이곳에 오두정(鰲頭亭)이란 정자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p>
<p><strong>간뎃말</strong> : 오두머리 옆에 있는 마을로 간뎃말에서 큰말로 넘어가는 고개를 간뎃말 고개라고 부른다.</p>
<p><strong>꽃말</strong> : 큰골 서쪽에 있는 산으로 진달래 꽃이 많이 피었다하여 불리어 졌다.</p>
<p><strong>돈대산</strong> : 오두돈대가 있는 산을 말한다.</p>
<p><strong>오두정터</strong> : 꽃말 북쪽에 있던 정자로 1602년(선조 25) 송인범이 지었다고 하며 오두에 있는 정자라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넙성리(芿城里)</strong></h4>
<p>이지역은 옛날 마성(馬城)이 있었던 곳으로 마초가 무성함을 상징하여 넙성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넙성동에 신현동 일부를 합하여 넙성리라 하였다. 넙성리의 넙(芿)자는 풀잉자를 쓰고 있으나 속칭으로 넙이라고 부르는데 어원은 확실치 않다.</p>
<p><strong>넙성(芿城)</strong> : 넙성리의 중심 마을로 지명은 리 유래와 같으며 속칭 넙세이라고 부른다.</p>
<p><strong>능골(陵谷)</strong> : 넙세이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곳에 능이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북성(北城)</strong> : 넙성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북성으로 부르고 있다.</p>
<p><strong>용마바위</strong> : 마봉산 서쪽에 있는 바위로 용마의 발자국과 비슷한 것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신현리(新峴里)</strong></h4>
<p>마을 중심지에 이름없는 고개가 있었는데 날로 발전하여 왕래자가 많아지자 새로운 모습이 된 고개로 변한 마을이라 신현동(新峴洞)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신현리라 칭하였다.</p>
<p><strong>막은골(杜谷)</strong> : 예전에 해수가 이 마을 앞까지 드나드는 것을 보고 뻘골이라 부르다가 제방을 쌓아 막은 후 막은골 즉, 두곡이라 부르고 있다.</p>
<p><strong>새말</strong> : 황골 남쪽에 새로 만든 마을을 말한다.</p>
<p><strong>솔정골(率丁谷)</strong> : 대모산 아래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병사들의 교육장이 있어 장정을 거느린 곳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쉬나무골</strong> : 새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휘나무가 있다.</p>
<p><strong>풀무르고개</strong> : 솔정에서 덕성리 봉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p>
<p><strong>황골고개</strong> : 신현리에서 길직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p>
<h4><strong>덕성리(德城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래의 덕진동(德津洞)과 광성동(廣城洞)을 합하고 덕진에서 덕자와 광성에서 성자를 취하여 덕성리라 하였다.</p>
<p><strong>광성(廣城)</strong> : 덕성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예전에 군사상 요새지였으며, 굴곡주회(屈曲周廻)의 성과 세 돈대가 있는 넓은 성이 있는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다.</p>
<p><strong>대모산(大母山)</strong> : 덕성리에 있는 강화의 모산이라는 의미로 대모산이라 부르며 예전에 봉수대가 있어 김포 약산봉수와 강화 진강산봉수에 응하였다.</p>
<p><strong>덕진</strong> : 봉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엔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곳에선 무리하지말고 덕스럽게 나루질을 해야한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p>
<p><strong>봉골</strong> : 대모산 밑에 있는 마을로 대모산에서 봉수를 올렸다는데서 봉골이라 부른다.</p>
<p><strong>손돌목</strong> : 덕성리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사이의 염하수로이며 물살이 험하고 좁은 바다목으로 고려때 어느 왕이 피난하던 길에 손돌목에 이르니 바다가 막힌 듯하고 물살이 세어짐으로 왕이 뱃사공 손돌을 의심하고 목베게 한바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였음에도 왕의 안전 항해를 위해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열릴것이다.”라고 말한 후 참수 당하였다고 하며 그후 임금 일행은 손돌의 이야기대로 하여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왕은 자기 잘못을 뒤늦게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고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지어 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손돌의 무덤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으며 해마다 음력 10월 20일경이면 찬바람이 불고 추위가 오는데 이를 손돌이 추위라고 전해온다.</p>
<p><strong>용두돈대(龍頭墩臺)</strong> : 덕진돈대 북쪽에 있는 돈대를 지형이 용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사두돈대라고도 한다.</p>
<h4><strong>삼동암리(三同岩里)</strong></h4>
<p>원래의 인정면(仁政面) 지역으로 모양이 비슷한 바위가 셋이 있는 동, 리라 하여 삼동암동이라 칭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서문동, 마장동 각 일부를 합하여 삼동암리라 하였다.</p>
<p><strong>박공재(朴公峴)</strong> : 유수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유명한 선비 박선생이 살았다하여 박공재 또는 박공현으로 부른다.</p>
<p><strong>백현(白峴)</strong> : 박공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백토가 많아 백현이라 부르며 흔부리라고도 한다.</p>
<p><strong>벌말</strong> : 삼동암리 북쪽 벌판에 있는 마을에서 유래되었으며 평촌이라고도 한다.</p>
<p><strong>신도현(新道峴)</strong> : 흔부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길이 난 마을이라 신도현으로 부른다.</p>
<p><strong>유수골(留守谷)</strong> : 박공재 남쪽에 있는 마을로 1290년(충렬왕 16) 몽골의 침입으로 서경유수 정인경과 왕경유수 송분이 이곳에 피난와 살았다하여 유수골이라 부른다.</p>
<p><strong>인경리(仁卿里)</strong> : 고려 충렬왕때 원나라의 침입으로 서경유수 정인경이 이곳에 피난와 살았는데 그후 그의 이름을 따라 인경리라 불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인정면으로 된 것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p>
<h4><strong>삼성리(三成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때 석성동(石城洞), 서문동(西門洞)과 마장동(馬場洞)의 각 일부를 합하였으며 세 마을을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하여 삼성리라고 부른다.</p>
<p><strong>돌성</strong> : 벌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삼동암천까지 해수가 들어왔는데 이곳에 돌로 성을 쌓아 피해를 막았다하여 돌성이라 부르며 석성이라고도 칭한다.</p>
<p><strong>마장동(馬場洞)</strong> : 서문안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고구려 혈구군시절 국마를 기르던 목장이 있는 마을이라 마장동이라 하였으며 속칭 매재이라고 부른다.</p>
<p><strong>서문안(西門內)</strong> : 매재이 서편에 있는 마을로 고구려 혈구군 시절 소재지의 서문이 있던 안쪽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숯고개</strong> : 돌성에서 선원면 선행리 술감으로 넘어다니던 고개로 숯을 굽던 고개라 숯고개라 부른다.</p>
<p><strong>습진벌</strong> : 옛 고구려 시절 군사훈련 하던 곳이라하여 습진벌이라 부른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농사지도를 담당하던 교습소가 있어서 농도원이라고도 칭한다.</p>
<p><strong>지네 벼락친골</strong> : 혈구산 중턱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지네가 스님을 잡아 먹는 것을 보고 벼락을 친 골짜기라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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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길상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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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5:12:19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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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시대에 길상산의 이름을 따라 길상면이라 칭하였으며 길상산에는 양마목장(良馬牧場)이 있었고 임금께 진상하던 약쑥과 감목관청에서 향탄(香炭)을 공급하는 등 이로 인해 좋은 행운이 깃들었다는 뜻으로 길상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온수리(溫水里) 옛부터 따뜻한 샘물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온수동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온수리라 하였다. 공장산 : 해랑당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질그릇을 굽던 공장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난자골(卵子谷) : 온수리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조선시대에 길상산의 이름을 따라 길상면이라 칭하였으며 길상산에는 양마목장(良馬牧場)이 있었고 임금께 진상하던 약쑥과 감목관청에서 향탄(香炭)을 공급하는 등 이로 인해 좋은 행운이 깃들었다는 뜻으로 길상이라 하였다고 전한다.</p>
<h4><strong>온수리(溫水里)</strong></h4>
<p>옛부터 따뜻한 샘물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온수동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온수리라 하였다.</p>
<p><strong>공장산</strong> : 해랑당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질그릇을 굽던 공장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난자골(卵子谷)</strong> : 온수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이 알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난자골 또는 난자울이라 부른다고하며 일설에는 바다에서 자라는 난초라는 풀이 자생하는 마을이라 난초고을로 부르던 것이 난자골로 변하였다고도 한다.</p>
<p><strong>내촌(內村)</strong> : 온수 사거리 서편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내촌이라 칭하며, 안말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동문골</strong> : 온수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삼랑성의 동문밑에 있어 동문골이라 한다.</p>
<p><strong>등잔모퉁이</strong> : 온수리 동북쪽에 있는 모퉁이로 등잔처럼 생겨 붙여진 지명이다.</p>
<p><strong>불당골(佛堂谷)</strong> : 예전에 정족산 삼랑성 북문아래 산골짜기에 절이 있었다하여 불당골이라 부른다.</p>
<p><strong>서두머리(鼠頭)</strong> : 온수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양쪽 가운데 돌출부분이 마치 쥐의 머리 모양과 흡사하다고하여 불러온 지명이다.</p>
<p><strong>야촌(冶村)</strong> : 예전에 서두머리 북쪽에 있던 마을로 이름난 대장간이 있어 야촌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길정저수지로 수몰되어 모두 이주하였다. 이런말이라고도 한다.</p>
<p><strong>여우고개</strong> : 온수시장에서 월오지를 왕래하는 고개로 여우가 살았다하여 불러온 지명이다.</p>
<p><strong>온수골(溫水谷)</strong> : 옛부터 추운 겨울에도 온정에서 빨래를 하며 몸을 녹였다하여 온정골로 불러오다가 지금은 온수골이라 부르며 온수시장 동남방이다.</p>
<p><strong>전등사(傳燈寺)</strong> : 고구려 381년(소수림 11)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진종사라 하다가 고려 충렬왕이 원비인 정화궁주가 불도에 전념하며 이절에 옥등을 전하였다고하여 전등사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온다.</p>
<p><strong>정족산(鼎足山)</strong> : 전등사를 싸고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마치 솥발 형상이라 하여 정족산이라 부르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정족산성도 이곳에 있다.</p>
<p><strong>해랑당(海浪堂)</strong> : 난자골 북쪽 강남중학교 앞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구리포 뚝을 막기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와 게가 민물과 짠물이 교차되는 이곳에서 알을 낳고 되돌아 간다고 하여 해란이라 부르던 것을 뒤에 해랑이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고려 고종때 도원수 김방경이 살던 집을 해령당이라 하였다가 뒤에 해랑당으로 개칭하였다고도 한다.</p>
<h4><strong>선두리(船頭里)</strong></h4>
<p>남쪽으로는 인천 서쪽으로는 서해바다가 있어 선박이 편히 기착할수 있는 지역으로 배머리를 돌려 들어가는 긴 마을이라 선두리라 하였다고 한다.</p>
<p><strong>구석촌</strong> : 산뒤 동쪽 구석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며 새말 또는 신촌으로도 부른다.</p>
<p><strong>굴우물</strong> : 가운데 말에 있는 우물로 바위에 굴이 뚫렸는데 그곳에서 샘이 난다고 하여 굴우물이라 한다.</p>
<p><strong>길마재</strong> : 무추내 동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소의 길마처럼 생겨 길마재라 부른다.</p>
<p><strong>낭터리고개</strong> : 무추내에서 동두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낭떠러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돈치기등</strong> : 돌뿌리 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지형이 평평해 예전에 나무꾼들이 돈치기를 하였다하여 불러온 이름이다.</p>
<p><strong>동두머리</strong> : 선두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선두포 뚝을 막기전까지는 해수가 드나들어 항해하는 선박이 기항하였으며 배가 출항하려면 동쪽을 거쳐갔기 때문에 동두머리라 하였다.</p>
<p><strong>산뒤</strong> : 온수리쪽에서 보면 길상산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 산뒤라 부르고 있다.</p>
<p><strong>서문턱</strong> : 선두포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정족산성의 서문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서산뒤</strong> : 산뒤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서산뒤라 부르며 택지돈대 윗마을이다.</p>
<p><strong>선두포(船頭浦)</strong> : 배머리나루라는 포구가 있는 마을이라 선두포라 하였다.</p>
<p><strong>선두포 뚝</strong> : 선두리와 화도면 사기리 사이의 갯골을 막은 뚝으로 1706년(숙종 32) 유수 민진원이 쌓았으며 선두포에 있다 하여 선두포 뚝이라 칭한다.</p>
<p><strong>애전동(艾田洞)</strong> : 예로부터 임금께 진상하던 약쑥의 명산지라 애전동이라 하였으며 속칭 숙밭다리라고 부른다.</p>
<p><strong>월오지(月烏池)</strong> : 선두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구에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반달같다 하여 월오지라 칭하였으며 속칭 달오지라고도 부른다.</p>
<p><strong>택이(擇里)</strong> : 산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모서리를 돌아 가는 마을이라 택리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택이라 하였다.</p>
<p><strong>할머니 놀이터</strong> : 긴골 옆산으로 산이 낮고 나무가 있어 할머니들의 놀이터로 사용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동검리(東檢里)</strong></h4>
<p>강화 동남방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옛날에 서해와 남해상에서 강화, 김포해협을 거쳐 한강을 통하여 서울로 전입하는 배들을 검문하던 곳이라하여 동검리라 부른다고 한다. 지금은 다리를 놓아 강화 본도와 연결되어 있다.</p>
<p><strong>봉우재</strong> : 양달말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봉수대가 있어 봉화를 올렸다하여 봉오재라 부른다.</p>
<p><strong>서두물</strong> : 큰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그 형상이 학머리 부분과 비슷하고 샘물이 좋아 서두물이라 하였다고 한다.</p>
<p><strong>숫구재</strong> : 뒷대 옆에 있는 산부리로 숯을 굽던 곳이라 한다.</p>
<p><strong>큰말</strong> : 서두물 남쪽에 있는 큰마을로 동검리의 중심마을이다.</p>
<p><strong>후대(後嶺)</strong> : 큰말 뒷편에 있는 마을이라 뒤재라 하다가 뒷대 또는 후대로 부른다.</p>
<h4><strong>초지리(草芝里)</strong></h4>
<p>옛날에 이곳에 광활한 풀밭이 있어 초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초지리라 하였다.</p>
<p><strong>내진(內津)</strong> : 앞재너머 동쪽에 있는 마을로 초지진 안쪽으로 김포시 대곶리를 왕래하는 나루터가 있어 내진이라 하였으며 터진개라고도 불렀다.</p>
<p><strong>대흥(大興)</strong> : 초지리에서 가장 크게 번성한 마을이라 대흥으로 칭하고 있으며 대촌으로도 부른다.</p>
<p><strong>밤나무골</strong> : 내진 서쪽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가 많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p>
<p><strong>신촌</strong> : 황산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이 자리를 잡아 새로된 마을이라하여 신촌이라 부른다.</p>
<p><strong>장안말</strong> : 예전에 성을 쌓고 말을 길렀다하여 장안말이라 하였으며 일설에는 온수리 장터 안쪽의 마을이라 장안말로 부른다고도 한다.</p>
<p><strong>장자말</strong> : 예전부터 부자가 누대로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불러온 이름이다.</p>
<p><strong>초북(草北)·초남(草南)</strong> : 초지마을이 점차로 커짐에 따라 북쪽을 초북, 남쪽을 초남으로 나뉘어 부르고 있다.</p>
<p><strong>토저골</strong> : 큰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토성을 쌓아 민폐를 적게하고 말을 기르던 곳이라 토저골로 부르고 있으며 토저말로도 부른다.</p>
<h4><strong>장흥리(壯興里)</strong></h4>
<p>옛부터 자손이 대대로 번성한다는 뜻으로 장흥동(長興洞)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긴장(長)을 장사장(壯)으로 바꾸어 장흥리(壯興里)로 칭하고 있다.</p>
<p><strong>감목관(監牧官)</strong> : 이리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길상목장에서 목마를 관리하던 감목관이 살았다는데서 유래하였다.</p>
<p><strong>당재</strong> : 서남촌에서 장안말 사이를 왕래하는 고개로 당집이 있어 당재라고 부른다.</p>
<p><strong>서남촌(西南村)</strong> : 고려장안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 마을에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있어 섬암촌(蟾岩村)으로 부르다가 서남촌으로 변하였다.</p>
<p><strong>오류골</strong> : 목자 등이 사용할 곡물저장창고가 있었다하여 오류골이라 불렀다고 한다.</p>
<p><strong>장남(壯南)·장북(壯北)</strong> : 장흥리 중심지에서 마을이 위치한 방향에 따라 북쪽은 장북, 남쪽은 장남이라 부르고 있다.</p>
<p><strong>황산들</strong> : 서남촌 동편 황산도와의 사이에 있는 개간한 넓은 들로 황산도와 연결하여 조성된 들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길직리(吉稷里)</strong></h4>
<p>본래 길상면 지역으로 직산동(稷山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길상면에서 길(吉)자와 직산동에서 직(稷)자를 따서 길직리라 하였으며 직산동은 농토가 적고 황무지에서 피를 심어 먹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관사말(官舍慢)</strong> : 효자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길상목장이 있었을 때 감목관과 목자들이 거처하던 관사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귓골</strong> : 관사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모양이 말귀와 비슷하다고 하여 구곡(廐谷)이라 부르다가 귓골로 개칭되었다.</p>
<p><strong>마그네(馬廐川)</strong> : 예전에 신현리와 이 마을에 있던 목장의 말이 마시던 냇물이라 마귀내라 하였으며 그곳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마그네라 부른다.</p>
<p><strong>방죽마을</strong> : 마그네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예전에 제방을 축조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방축(防築)마을로 부르다가 방죽마을로 변하였다고 한다.</p>
<p><strong>백운골(白雲谷)</strong> :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하였을 때 백운 이규보가 피난와서 말년에 불은면 두운리에 살다가 이곳에 묻혀있는 곳이라 하여 백운골이라 칭한다.</p>
<p><strong>장촌(張村)</strong> : 옛부터 인동 장씨의 집성촌이라 장촌으로 부른다.</p>
<p><strong>피미(稷米)</strong> : 예전에 이 마을은 논이 적고 산전이 많아 피를 재배하여 먹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효자터</strong> : 관사촌 서쪽에 있는 마을로 효자가 살던 마을이라 효자터라 부르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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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화도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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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1:40:35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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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옛날에는 고가도(古加島)란 섬이었으며 강화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하도면(下道面)이라 칭하다가 1937년 하도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있던 일본인 산원(山元)의 제청으로 하도(下道)라는 명칭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화도(華道)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내리(內里) 옛부터 마을은 안락한 생활을 영위토록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마을모양이 한자의 내(內)자와 비슷하고 산모양이 또한 흡사하여 내리라 칭하였으며 넓은 골안에 있는 마을이라 안골로도 부른다. 간촌(間村) : 내리의 큰말과 동촌사이에 있어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옛날에는 고가도(古加島)란 섬이었으며 강화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하도면(下道面)이라 칭하다가 1937년 하도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있던 일본인 산원(山元)의 제청으로 하도(下道)라는 명칭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화도(華道)로 개칭하였다고 한다.</p>
<h4><strong>내리(內里)</strong></h4>
<p>옛부터 마을은 안락한 생활을 영위토록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마을모양이 한자의 내(內)자와 비슷하고 산모양이 또한 흡사하여 내리라 칭하였으며 넓은 골안에 있는 마을이라 안골로도 부른다.</p>
<p><strong>간촌(間村)</strong> : 내리의 큰말과 동촌사이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샛말이라고도 한다.</p>
<p><strong>동산촌(東山村)</strong> : 샛말 남쪽지대 높은곳에 있으며 산과 접한 지역에 위치한 마을이라 동산촌이라 부르며 동산말이라고도 한다.</p>
<p><strong>막은골(杜谷)</strong> : 내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동구에는 두 골짜기가 있어 외부에서 보면 동리가 사면으로 막혀 있는 듯하여<br />
막은골 또는 두곡이라 부른다.</p>
<p><strong>소루지</strong> : 내리 북쪽 해변에 있는 마을로 솔곶이가 솔오지, 소루지로 된 듯하며 솔곶은 좁은 언덕이란 뜻으로 일명 송강포(松岡浦)라고도 한다.</p>
<p><strong>큰말</strong> : 내리의 중심이 되는 큰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대촌으로도 부른다.</p>
<p><strong>후포(後浦)</strong> : 내리 안말에서 보면 뒷개안이라 후포라고 부르며 이곳의 지형이 노루목같다고 하여 노루메기라고도 한다.</p>
<h4><strong>상방리(上坊里)</strong></h4>
<p>화도면에서도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상방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상방리라 칭하였다.</p>
<p><strong>개미허리</strong> : 상방리 남쪽 마니산 중록에 있으며 산모양이 개미허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고창촌(串唱村)</strong> : 숙종때 가능포 뚝을 축조 이전까지는 작은섬으로 출어기에 풍어제를 올렸는데 그 배굿의 명칭을 곶창굿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덕골말</strong> : 상방리와 내리 경계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조하몽과 안오위장이라는 두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가세가 빈곤하여 이 두 부자집에서 도와 주어 생계를 유지하여 덕을 입었다는 뜻으로 덕골이라 부른다.</p>
<p><strong>도깨비동산</strong> : 상방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비가 올 때 도깨비가 나타났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동촌(東村)</strong> : 상방리 동쪽 마니산 등산로 입구 일대의 마을로 상방리 동편에 있어 동녘말이라 칭하다가 근래에 와서 동촌으로 부른다.</p>
<p><strong>서구촌(西溝村)</strong> : 상방리 화도초등학교가 소재한 마을로 마을 중앙에 있는 개울을 중심으로 개울 주변과 개울 서편 마을을 합쳐 서구촌으로 부른다.</p>
<p><strong>석수말</strong> : 동촌 옆에 있던 마을로 석수장이가 살았다하여 석수말이라 하였다.</p>
<p><strong>용무골</strong> : 서구촌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용이 하늘로 올라가다가 임산부가 쳐다보아서 떨어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하며 일명 용못골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은구덩이</strong> : 상방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은과 여러 보물이 났다고하여 은구덩이라 부른다고 한다.</p>
<h4><strong>문산리(文山里)</strong></h4>
<p>예전부터 박뫼산의 이름을 따라 박산동(博山洞)이라 칭하다가 문뫼산의 이름을 따서 문산동이라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문산리라 하였다.</p>
<p><strong>문곡(文谷)</strong> : 문산리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약수곡이 있어 문산리에서 문자와 약수곡의 곡(谷)자를 따서 문곡이라 부른다.</p>
<p><strong>문현(文峴)</strong> : 마을 중앙에 달보기 산이 있어 문산리의 문자와 월현산(月峴山)의 현자를 따서 문현이라 칭하고 있다.</p>
<p><strong>약밭골</strong> : 충청바위 위에 있는 골짜기로 약수터가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약수곡으로도 부른다.</p>
<p><strong>우물고개</strong> : 문산리에서 덕포리를 왕래하는 고개에 샘이 있어 우물고개라 부른다.</p>
<p><strong>재궁(齋宮)</strong> : 참성단에서 하늘에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릴 때 제관들이 재숙하던 곳이라 하여 재궁이라 부르며 제기와 제물도 준비하던 곳이다.</p>
<h4><strong>덕포리(德浦里)</strong></h4>
<p>1706년(숙종 32) 선두포 뚝을 막기전에는 배가드나 들던 포구마을로 왕래자가 많아 손님들을 상대로 맛이 좋고 값도 싼 떡을 팔아 떡장사들이 부자가 되었다고하며 떡장사가 많은 포구라 떡포리라 칭하다가 덕포리로 부른다고 한다.</p>
<p>눈소나무재 : 윗말에서 양달말을 왕래하는 고개로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p>
<p><strong>덕달(德達)</strong> : 양도면과 덕포리 사이를 배가 다닐 때 처음 닿는 포구로 떡장사가 많아 떡달포라 부르다가 덕달촌으로 칭한다고 하며 덕포리 북쪽 끝 마을이다.</p>
<p><strong>돌다리</strong> : 덕포앞 하천에 있던 돌로 된 다리라 하여 붙인 이름으로 지금은 새로 놓고 덕포교라 부른다.</p>
<p><strong>머겸</strong> : 윗말 동편골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머귀나무가 있어 머겸이라 하였으며 그 안쪽에 있는 마을를 안머겸이라 한다.</p>
<p><strong>신촌</strong> : 마을 뒷산에서 흐르는 세줄기 시냇가에 형성된 새로운 마을로 삼촌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새말이라 하여 신촌으로 부른다.</p>
<p><strong>양지촌(陽地村)</strong> : 화도면 여러 마을 중에서 햇볕이 가장 먼저 비치는 마을이라 하여 양달말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양지촌으로 개칭하였다.</p>
<p><strong>윗말(上村)</strong> : 머겸 서쪽에 있는 마을로 전주 유씨 문중에서 낙향한 할아버지가 처음와서 살던 곳(윗대어른이 살던 곳)이라하여 윗말 또는 상촌이라한다.</p>
<p><strong>장풍고개</strong> : 시내말에서 덕달을 왕래하는 고개로 평평하고 길어서 장풍고개라 부른다.</p>
<p><strong>족실방죽(足失防築)</strong> : 조선후기 의병대장 이능권(李能權)이 일본군대와 선두포 방죽을 끼고 일대 격전을 벌려 일병 30여 명의 발목을 잘라 방죽에 던져 족실방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경지정리로 들로 변하였다.</p>
<p><strong>초피산(椒皮山)</strong> : 덕포리 뒤편에 있는 산으로 산 모양이 붓 끝과 같이 뾰죽하다고 하여 초피산이라 부르며 문필봉이라고도 한다.</p>
<p><strong>하나골</strong> : 옛부터 이 고을에 한문서당이 있어 한문을 배우고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한학골이라 부르다가 하나골로 칭한다고 한다.</p>
<p><strong>할미바위</strong> : 남편이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가 돌아오지 않아 그의 아내가 바위에 올라가 늘 바다쪽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p>
<h4><strong>사기리(沙器里)</strong></h4>
<p>옛부터 이 마을에 도요지가 있어 분청사기의 산지라 하여 사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사기리라 칭하였다.</p>
<p><strong>작은사골(小沙谷)</strong> : 사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호수가 작은 곳이라 하여 작은사골이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큰사골</strong> : 호수가 크다하여 큰사골이라 하였으며 고려시대 분청사기의 산지라고 전한다.</p>
<p><strong>함허동천(涵虛洞天)</strong> : 정수사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반석이 200m 펼쳐 있고 폭포가 있어 경치가 아름다워 세종때 함허대사가 정수사에서 수도하면서 이곳 바위에 함허동천이란 네글자를 새겼다는데서 유래되었다.</p>
<h4><strong>동막리(東幕里)</strong></h4>
<p>흥왕리에서 동남방을 바라보면 산이 절벽을 이루고 있어 장막을 친것과 흡사하다고 하여 동막리라 칭한다.</p>
<p><strong>대동</strong> : 동막리의 중심 마을로 큰말이라 대동으로 부른다.</p>
<p><strong>덕고개</strong> : 장전에서 대동을 왕래하는 고개로 병자호란때 전염병으로 사람이 많이 죽어 임시로 시신을 모셨다가 장례를 치른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멍석바위</strong> : 장전뒤에 있는 바위로 넓어서 벼를 널어 말릴 수 있던 바위라 하여 멍석바위라 부른다.</p>
<p><strong>못골</strong> : 긴밭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못이 있어서 못골이라 불렀다.</p>
<p><strong>분오리고개</strong> : 대동마을 중심에서 분오리 고개쪽을 보면 가깝게 보이면서도 실제 걸어보면 오리길이나 되어서 분오리고개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장전(長田)</strong> : 큰말 서편에 긴밭이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정수고개</strong> : 긴밭말에서 사기리 정수사를 넘어다니는 고개라 하여 정수고개라 부른다.</p>
<p><strong>정수사(淨水寺)</strong> : 신라 639년(성덕여왕 8)에 회정선사가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하였는데 그후 함허대사가 중수한 후 법당 서편에서 맑은 샘을 발견하고 지금의 정수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p>
<h4><strong>흥왕리(興旺里)</strong></h4>
<p>고려 1259년(고종 46)에 창건한 흥왕이궁이 있어 흥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흥왕리가 되었다.</p>
<p><strong>골말</strong> : 큰말 서북쪽 마니산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골말이라 부르며 곡촌이라고도 한다.</p>
<p><strong>대궐터</strong> : 큰말 뒤에 있는 1259년에 창건한 흥왕이궁이 있던 자리라 하여 대궐터라 부른다.</p>
<p><strong>대흥</strong> : 고려 고종때 흥왕이궁이 있던 자리 인근에 형성된 마을로 흥왕리에서 제일 크다하여 큰말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흥으로 호칭하고 있다.</p>
<p><strong>마니산성</strong> : 고려때 쌓은 석성으로 마니산 서남일대에 성터가 남아 있어 불러진 이름으로 1666년(현종 7)에 강화유수 서필원이 성을 헐것을 건의하여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p>
<p><strong>매너미고개(鷹踰峴)</strong> : 마니산 서편 줄기로 흥왕리 대흥에서 내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고 험하여 매나 넘을 수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홍익한 택지(洪翼漢宅址)</strong> : 인조때에 척화파로 윤집, 오달제와 더불어 삼학사의 한 사람인 홍익한이 살던 집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여차리(如此里)</strong></h4>
<p>미루지의 고뿌리산과 여차뿌리산이 함께 뻗어 있다하여 여차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여차리가 되었다.</p>
<p><strong>구석말</strong> : 여차리 서쪽 구석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구석말이라 부른다.</p>
<p><strong>미루지(美樓地)</strong> : 여차리 동편 마을을 말하며 해변에 아름다운 누각이 있어 미루지라 칭하였으며 일설에는 이곳에서 해변을 바라보면 마치 다락방에 앉아 있는 것 같아 미루지라 부른다고도 한다.</p>
<p><strong>새꾸지</strong> : 여차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꾸지라고 부른다.</p>
<p><strong>지부새</strong> : 새꾸지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p>
<p><strong>천냥구댕이</strong> : 미루지 옆에 있는 개울로 옛날에 천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p>
<h4><strong>장화리(長花里)</strong></h4>
<p>마을이 해변으로 길게 형성되었고 서쪽으로 산이 길게 뻗어 곶을 이루고 있어 장곶동(長串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길다는 뜻의 장(長)자와 곶(串)을 화(花)로 바꾸어 장화리로 개칭한 듯 하다.</p>
<p><strong>김촌(金村)</strong> : 장곶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김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살고있어 김촌이라 하였으며 옛 장곶보의 진이 있던 마을로 진말로도 부른다.</p>
<p><strong>버드러지</strong> : 큰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줄기가 버드러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러온 이름으로 마을 중앙에 큰 버드나무가 있다고 하여 유촌(柳村)으로도 부른다.</p>
<p><strong>주촌(朱村)</strong> : 신안 주씨가 10여 대를 집단으로 세거해 온 마을에서 유래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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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도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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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1:28:32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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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시대 이후 하도면과 마주하면서 옛 진강현의 부치쪽 곧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 상도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위량면(位良面)과 합하고 위량면에서 양(良)자와 상도면에서 도(道)자를 따서 양도면이라 칭하였다. 길정리(吉亭里) 조선시대 이래 길상면 관할에 정자가 있는 마을을 정두동과 정하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길상면에서 길(吉)자와 정두(亭頭), 정하(亭下)동에서 정(亭)자를 취하여 길정리라 하고 개편 신설된 양도면에 편입되었다. 곤릉(坤陵) : 고려 강종의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조선시대 이후 하도면과 마주하면서 옛 진강현의 부치쪽 곧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 상도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위량면(位良面)과 합하고 위량면에서 양(良)자와 상도면에서 도(道)자를 따서 양도면이라 칭하였다.</p>
<h4><strong>길정리(吉亭里)</strong></h4>
<p>조선시대 이래 길상면 관할에 정자가 있는 마을을 정두동과 정하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길상면에서 길(吉)자와 정두(亭頭), 정하(亭下)동에서 정(亭)자를 취하여 길정리라 하고 개편 신설된 양도면에 편입되었다.</p>
<p><strong>곤릉(坤陵)</strong> : 고려 강종의 원비 원덕태후의 능인 곤릉이 있다 하여 유래되었다.</p>
<p><strong>문현(門峴)</strong> : 정하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시대 진강목장이 있었을 때 이 마을에 토성의 문이 있었다하여 문현 또는 문고개라 칭한다.</p>
<p><strong>정하동(亭下洞)</strong> : 길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옛 정두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정하동이라 부르고 있다.</p>
<p><strong>황경천(黃慶川)</strong> : 옛날에 황씨성을 가진 부자가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금을 냇가에 묻고 죽은 후 그 자손도 이 금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여 하천 이름을 황금천이라 불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황경천으로 변하였다.</p>
<h4>
<strong>도장리(道場里)</strong></h4>
<p>예전에 진강목장이 있었을 때 목장머리에 있는 마을이라 장두동(場頭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그아래 마을인 장하동(場下洞)을 합하고 상도면에서 도(道)자와 장두, 장하동에서 장(場)자를 따서 도장리라 칭하였다.</p>
<p><strong>서낭고개</strong> : 어두니에서 삼흥리를 왕래하는 고개로 그곳에 서낭당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p>
<p><strong>대흥(大興)</strong> : 도장리 삼거리 일대에 있는 마을로 크게 번성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러온 이름인 듯 하다.</p>
<p><strong>어두(魚頭)</strong> : 대흥 동북편 길정리와 경계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물고기의 머리 모양과 비슷하여 어두라 하였으며 속칭 어두니라 부른다.</p>
<p><strong>장아래(場下)</strong> : 예전 진강목장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장아래라 부르며 종전의 장하동을 이른다. 일설에는 옛날에 이 마을 윗 동네에 큰 장터가 있어 그 아래 마을을 장아래라 부른다고도 한다.</p>
<p><strong>진강목장터</strong> : 옛날에 도장리 진강산 아래에 국마를 기르던 목장이 있던 터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추포정터</strong> : 추포 황신(黃愼)의 정자가 있던 자리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학바위</strong> : 어두니 북쪽에 있는 바위로 학처럼 생겼다 하여 학바위라 부른다.</p>
<h4>
<strong>조산리(造山里)</strong></h4>
<p>옛날 이 마을에 장수 세사람이 태어나 마을 가운데에다 흙을 쌓아 작은 산을 만들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조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조산리라 하였다.</p>
<p><strong>가오라기</strong> : 진들 서편에 있는 마을로 앞개울에 가오라기(모시조개)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조구부창</strong> : 국정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나루가 있었으며 조기를 남쪽 방언에서 조구라 하는데 강화, 김포 해안 마을에서도 지명에서 조구로 남은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기를 잡아오던 포구에서 유래된 듯하다.</p>
<p><strong>조산</strong> : 옛부터 죄미라 불렀는데 조산을 고어로 조뫼라 한 것으로 보아 조뫼가 죄미로 변한 듯 하다.</p>
<p><strong>진틀</strong> : 죄미 서편에 있는 마을로 예전 진강현의 군부대가 주둔하던 곳이라 진터로 부르다가 진틀로 변했다고 한다.</p>
<h4>
<strong>능내리(陵內里)</strong></h4>
<p>고려 원종의 비 순경태후의 능인 가릉(嘉陵)이 있어 능내리라 한다.</p>
<p><strong>공숙(公塾)</strong> : 능내 서쪽 옹일 안쪽에 있으며 사설 서당이 있던 마을로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공부할 수 있는 고장이라 하여 공숙으로 부르고 있다.</p>
<p><strong>능안</strong> : 가능 서편 골안에 있는 마을이라 능안으로 부른다.</p>
<p><strong>탑재</strong> : 능내리에서 화도면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 탑이 있어 붙인 지명이다.</p>
<h4>
<strong>하일리(霞逸里)</strong></h4>
<p>서해에 접해 있고 경관이 좋아 세상을 멀리하며 숨어 사는 은둔의 마을이라 하여 하일리라고 한다.</p>
<p>능안고개 : 하일리와 능내를 왕래하는 고개라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벌대총(伐大蠅)터</strong> : 하일리 뒤에 있는 말 무덤터로 효종이 이곳 진강목장에서 생산된 명마의 이름을 벌대총이라 지은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송릉골</strong> : 무구낫 서쪽에 송릉이란 능이 있던 자리라 하여 그곳 골짜기를 송릉골이라 한다.</p>
<p><strong>옹일(壅逸)</strong> : 산자락이 넓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옹색한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하곡초당(霞谷草堂)터</strong> : 하일고개 남쪽에 있던 양명학의 태두로서 강화학파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하곡 정제두가 살던 집터라 붙인 이름이다.</p>
<p><strong>하우고개(霞遇峴)</strong> : 진강산 서편으로 뻗은 산줄기에 있는 하일에서 삼흥리를 왕래하는 높은 고개로 남쪽골에 하곡 정제두가 우거하여 하곡현이라 부르다가 하우고개로 칭하고 있으며 하일에 있어 하일고개라고도 한다.</p>
<h4>
<strong>건평리(乾坪里)</strong></h4>
<p>이 마을이 자리잡은 곳이 건조한 들녘에 있어 건평리라 부르며 일설에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이라 하여 건평리라고도 칭한다.</p>
<p><strong>노고산(老姑山)</strong> : 건평리 서편 해안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한 노파가 이곳에 살았다 하여 노고산이라 한다. 이 노파는 기인으로 이 산과 해중에 있는 대섬에 양쪽 다리를 걸치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p>
<p><strong>대화촌(大華村)</strong> : 윗 건들에 있는 큰마을이라 대화촌이라 부르고 있다.</p>
<p><strong>돌구지</strong> : 진장포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물이 돌아 흐르는 곳이라 하여 돌구지라 부르고 있다.</p>
<p><strong>양지촌(陽地村)</strong> : 건들 동편 양지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양지촌이라 한다.</p>
<p><strong>진장바위</strong> : 대화촌 서쪽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서 김장거리를 씻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해망(海望)</strong> : 양지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바다가 잘 바라보인다는 뜻으로 해망이라 하였다.</p>
<p><strong>화촌(華村)</strong> : 본래 아랫마을이란 뜻으로 하촌(下村)이라 불렀으나 1930년경 화촌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농민들의 여론에 따라 화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p>
<h4>
<strong>삼흥리(三興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삼문(三門)·흥천(興川)·존강(存江) 등 세 마을을 합하고 삼문과 흥천에서 한글자씩 취하여 삼흥리라 하였다.</p>
<p><strong>산문</strong> : 종래의 산문동(山文洞)이 산문동(山門洞)으로 바뀌었으며 산문동을 훈독하면 뫼갈마을로 진강산 북편골에 자리잡은 마을에서 유래된<br />
듯하며 속칭 산문이라고 부른다. 삼문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직전까지 일시 사용하였던 산문의 옛 지명이다.</p>
<p><strong>수차골(水車谷)</strong> : 산문 남쪽에 있는 골로 물레방아가 있던 곳이라 하여 수차골이라 부른다.</p>
<p><strong>신선우물</strong> : 존강과 산문 중간에 있는 우물로 신선이 마셨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p>
<p><strong>월정(月井)</strong> : 존강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는데 달이 뜨면 항상 이 우물에 비추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달우물, 다릿말이라고도 한다.</p>
<p><strong>존강</strong> : 존강은 강, 즉 시내가 있는 마을로 예전에 조수가 이 마을 앞까지 들락거린데서 유래되었으며 속칭 종개이라고 부른다.</p>
<p><strong>흥천</strong> : 삼흥리에서 제일 큰 마을로 예전에 이곳 계암산 중록에 흥천사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p>
<h4>
<strong>인산리(仁山里)</strong></h4>
<p>조선시대 이래 위량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전 위량면 관할의 낙인동(樂仁洞)과 항주동(項州洞)에 흥천동 일부를 합하고 낙인동과 퇴모산(退帽山)에서 한글자씩 취하여 인산리라 하였다.</p>
<p><strong>국사봉(國賜峯)</strong> : 황골 뒤에 있는 산으로 고려후기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全信)에게 내린 사패지라하여 국사봉으로 부른다.</p>
<p><strong>다락말(樓村)</strong> : 황골 서편에 있는 마을로 다락과 같이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다락말이라 칭한다고 한다.</p>
<p><strong>성전(星田)</strong> : 황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 마을에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성전이라 하였으며 우리말로 풀어서 별밭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비선거리</strong> : 호박골 앞에 있던 마을로 길가에 유수의 비가 있어 비선거리라 하였으나 1977년 인산저수지 건설로 수몰되어 지명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p>
<p><strong>야곡(冶谷)</strong> : 더치, 풀무골이라고도 부르며 예전에 이 마을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왕방(王訪)</strong> : 태종이 잠저시 동문 수학한 전신의 생가 마을인 이곳을 방문하였다는데서 유래되었으며 속칭 왕배이라고 부른다.</p>
<p><strong>절텃골</strong> : 왕방촌 뒤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임해사(臨海寺)란 절이 있다하여 불러온 이름이다.</p>
<p><strong>호박골</strong> : 양지 왕방 서편마을로 호박이 잘되어 호박골이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황곡(璜谷)</strong> : 속칭 황골이라 하며 황골은 큰골, 큰마을의 뜻을 가진 지명으로 옛 강주현이 있었다고 전해온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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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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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1:17:54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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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시대 이래로 내가면이라 하였는데 내가면이란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 있던 외가면(外家面)의 안쪽에 있다는 뜻으로 상대적 개념으로 붙여진 듯 하다. 고천리(古川里) 옛부터 고려산과 혈구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유수(流水)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고상동(古上洞)과 고하동(古下洞)에서 고(古)자와 자연마을인 현천(玄川)에서 천(川)자를 따서 고천리라 하였다. 고려지(高麗池) : 고려산과 혈구산에서 내려오는 유수가 모여 형성된 저수지로 고려산의 이름을 따라 고려지라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조선시대 이래로 내가면이라 하였는데 내가면이란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 있던 외가면(外家面)의 안쪽에 있다는 뜻으로 상대적 개념으로 붙여진 듯 하다.</p>
<h4><strong>고천리(古川里)</strong></h4>
<p>옛부터 고려산과 혈구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유수(流水)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고상동(古上洞)과 고하동(古下洞)에서 고(古)자와 자연마을인 현천(玄川)에서 천(川)자를 따서 고천리라 하였다.</p>
<p><strong>고려지(高麗池)</strong> : 고려산과 혈구산에서 내려오는 유수가 모여 형성된 저수지로 고려산의 이름을 따라 고려지라 부른다.</p>
<p><strong>고부(古阜)</strong> : 옛날에 오얏나무가 많은 언덕위에 형성된 마을이라 고부라 칭하였으며 속칭 고비라고 한다.</p>
<p><strong>괸돌고개</strong> : 고부에서 오상리를 왕래하는 고개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길마재</strong> : 현천 서남쪽에서 외포리를 왕래하는 고개로 그 형상이 소의 길마와 비슷하다고 하여 불러온 명칭이다.</p>
<p><strong>나루고개</strong> : 연촌에서 강화읍 국화리를 왕래하는 고개로 옛지명 나루는 늘어졌다는 뜻으로 높고 길게 뻗어나간 늘어진 고개에서 유래된 듯 하며 일설에는 옛날에 고개밑까지 조수가 들어와 나루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p>
<p><strong>낙조봉(落照峯)</strong> : 적석사 뒷산 봉우리로 해가 지는 서해바다의 정경이 매우 아름답고 잘보인다고 하여 낙조봉이라 하였다.</p>
<p><strong>독구루미</strong> : 질 그릇을 구워 만들던 곳에서 유래되었으며 독을 구웠다는 말이 오랜세월 전래되는 동안 독구루미가 되었다고 한다.</p>
<p><strong>망산(網山)</strong> : 예전에 나라에서 유사시 불과 연기로 통신을 하던 망대가 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덕산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생골</strong> : 장경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좋은 샘이 있어 샘골이라 하였는데 생골로 변하였다고 한다.</p>
<p><strong>송장골</strong> :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많이 산재해 있다하여 송장골이라 부른다.</p>
<p><strong>신선지(神仙池)</strong> : 고려저수지 위쪽에 있는 작은 저수지로 옛날에 이곳에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p>
<p><strong>연촌(蓮村)</strong> : 옛날에 고려산 정상에서 인도 고승이 연꽃을 날려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연촌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p>
<p><strong>왓벌(瓦坪)</strong> : 아랫고비 서쪽에 있는 들로 기와를 굽던 가마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고려지에 잠기었다.</p>
<p><strong>장골</strong> : 아래고부 윗쪽 긴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 장골로 부른다고 한다.</p>
<p><strong>조계(釣溪)</strong> : 옛날에는 이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들어와 낚시질을 하는 시내가 있다고 하여 조계라 부른다.</p>
<p><strong>함박산</strong> : 아랫고부 동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함박꽃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현천(玄川)</strong> : 고천리의 중심마을로 예전에 오상리에 사는 조진사라는 선비가 몹시 가난하여 산에서 나무를 하면서 가랑잎에 숯으로 글씨를 썼다고 하며 비가 오면 숯이 빗물에 씻기어 검은 빛의 내를 이루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혈구산</strong> : 큰 굴이 있어 혈굴산(穴窟山)이라 하다가 혈구산으로 변하였다고 전한다.</p>
<p><strong>황골재</strong> : 아랫고부 남쪽에서 양도면 인산리 황골을 왕래하는 고개라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오상리(鰲上里)</strong></h4>
<p>산의 형상이 자라꼬리처럼 생긴 오미산(鰲尾山)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라 오산이라 부르다가 오상으로 개칭하였다.</p>
<p><strong>구상(鳩上)</strong> : 옛 구상동으로 구주머리 위편에 있는 마을이라 구상이라 하였다.</p>
<p><strong>방아재</strong> : 봉성 북쪽 산 밑에 있는 마을로 연자방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봉성(鳳城)</strong> : 오상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있는 봉익산 주변에 토성을 쌓아 봉성이라 부른다고하며 속칭 성뒤라 부른다.</p>
<p><strong>싱아골</strong> : 싱아가 많이 나서 싱아골이라 부르며 산봉우리가 두 개 있어 큰봉우리를 큰 볏누리, 작은 봉우리를 작은 볏누리라 하며 정월 보름에 달이 큰 볏누리에 오르면 풍년이 들고 작은 봉우리에 오르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p>
<p><strong>오산(鰲山)</strong> : 산 모양이 자라꼬리처럼 생긴 오미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고하며 속칭 고상골이라 부른다.</p>
<p><strong>장사바위</strong> : 중산이 동쪽에 있는 큰바위로 장사가 누웠다는 큰 자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외포리(外浦里)</strong></h4>
<p>원래는 위량면 지역으로 외주동(外州洞)과 정포동(井浦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내가면 관할이 되었고 외주동에서 외(外)자와 정포동에서 포(浦)자를 취하여 외포리라 하였다.</p>
<p><strong>당산(堂山)</strong> : 정포 북동쪽에 있는 득대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는 산에서 유래하였으며 무속에서 절대 신봉의 수군장(水軍將)으로 숭앙하고 있다.</p>
<p><strong>당산골</strong> : 당산 밑에 있는 골짜기에서 유래되었으며 광해군의 세자 지(祗)와 세자빈 박씨가 이곳에 유폐되었다가 세자가 사사됨에 박씨가 사흘을 울다가 자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p>
<p><strong>대정(大井)</strong> : 정포 윗쪽 마을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샘이 나는 이름난 우물이 있어 대정이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도둑재</strong> : 외포리  박골고개 중간에 위치한 지점으로 예전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한적하여 도둑이 자주 나타나 행인을 괴롭혀 도둑재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소개(蘇峴)</strong> : 소고개는 수리계의 지명으로 높은 곳을 의미함으로 높은 언덕이 있는 고개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개아래 마을 이름도 소개라 부른다.</p>
<p><strong>외주(外州)</strong> : 정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고을터가 있었다고 전해오는 항주동(項州洞) 밖에 있는 마을이라 외주라 하였으며 속칭 밖골로 부르고 있다.</p>
<p><strong>장지포(長池浦)</strong> : 양도면 건평리 한포에서 북으로 외포앞들까지 축조된 뚝안에 길게 생긴 저수지라 장지포라 하였으며 그곳에 있는 들도 장지포 들이라 한다.</p>
<p><strong>전토골</strong> : 옛이름은 절토골이라 하였는데 빈대가 많아 절을 불태웠다고 하며 절토골이 변하여 전토골이 되었다.</p>
<p><strong>정포(井浦)</strong> : 외포리 포구옆에 이름난 우물이 있는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터진동</strong> : 외주동 남쪽에 있는 방죽으로 홍수가 나 뚝을 작게 터놓았다가 뚝이 완전히 터지고 말아 터진동이라 부른다.</p>
<h4><strong>황청리(黃淸里)</strong></h4>
<p>황극운(黃極運)의 맑은 물이 흘러서 큰 인물이 난다고 하여 황청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황청동 일부를 구하리에 넘겨주고 황청동과 포촌동을 합해 황청리라 하였다.</p>
<p><strong>국촌(國村)</strong> : 국수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국촌이라 하였다.</p>
<p><strong>두문동(杜門洞)</strong> : 수탯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때 벼슬하던 선비들이 태조의 개국을 반대하여 이곳에 숨어 살았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개경에 있던 두문동을 모방하여 부른 듯 하다.</p>
<p><strong>말바위</strong> : 말의 형상을 하여 말바위라고 부르며 어느 해 비가 많이 왔을 때 이 바위가 뒤집혀 있는 것을 동민들이 다시 뒤집어 놓았으나 뒷몸이 바다를 향해 놓여 분뇨가 바다로 나가 윗말에는 부유한 사람이 없고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다고 하며 바위 머리가 바다를 향하면 마음대로 물을 먹을 수 있어 인재가 나고 부자가 많이 난다고 전해오고 있는 바위이다.</p>
<p><strong>소릉(紹陵)고개</strong> : 황청리 동북쪽 고천리와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려시대 희종의 비 성평왕후 임씨의 능으로 추정되는 소릉이 있던 곳에서 유래되었으며 수래이고개라고도 부른다.</p>
<p><strong>수촌(水村)</strong> : 골이 깊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 수촌으로 부르고 있다.</p>
<p><strong>용머리산</strong> : 산의 형상이 용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원수골</strong> : 고려 고종때 몽골이 침입하여 주민을 몰살시켰다는 골짜기라 하여 원수골이라 부르고 있다.</p>
<p><strong>출럭궁바위</strong> : 국촌 남쪽 국수산 밑에 있는 바위로 위에 올라가서 발을 구르면 들석들석하여 출럭궁바위라고 한다.</p>
<p><strong>포촌(浦村)</strong> : 황청리 포구에 있는 마을이라 포촌이라 부르고 있으며 삼산, 교동, 서도면을 왕래하였다.</p>
<h4><strong>구하리(鳩下里)</strong></h4>
<p>덕산 낭떠러지에서 비둘기가 내려와 강구지에 와서 알을 낳았다고 하여 구하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구하동에 황청동 일부를 합하여 구하리라 하였다.</p>
<p><strong>냉구렁</strong> : 평전 동북쪽 낭떠러지 밑 구렁에 있는 마을로 낭구렁이라 하였는데 냉구렁으로 변하였다고 한다.</p>
<p><strong>대장간골</strong> : 마을 입구에 대장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대흥</strong> : 옛날에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동제를 지내던 신당인 대흥당이 있어 대흥이라 하였으며 속칭 댕대이라고 부른다.</p>
<p><strong>새밭두이</strong> : 낭치랭이 위에 있는 들로 새로 만든 밭뚝이 있어 새밭두이라고 부른다.</p>
<p><strong>양릉고개</strong> : 구하리와 황청리를 왕래하는 고개로 고려때 양릉이란 능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p>
<p><strong>평전</strong> : 구개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둔전이 있었으며 평평한 밭이 많아 평전이라 부른다.</p>
<p><strong>해당화벌</strong> : 바다 성뚝에 해당화가 많아서 해당화벌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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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하점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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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0:53:03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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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고려때 있던 하음현(河陰峴)의 이름을 따서 조선시대 이래로 하음면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하음면에 간점면(艮岾面)과 외가면(外家面)을 합하고 하음에서 하(河)자와 간점에서 점(岾)자를 따서 하점면이라 하였다. 신봉리(新鳳里) 옛부터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말, 신촌동(新村洞)이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신촌동에서 신(新)자와 봉상동(鳳祥洞)에서 봉(鳳)자를 따서 신봉리라 하였다. 가막내 : 봉천산 서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이강리 앞 뜰을 거쳐 가막다리 밑으로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고려때 있던 하음현(河陰峴)의 이름을 따서 조선시대 이래로 하음면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하음면에 간점면(艮岾面)과 외가면(外家面)을 합하고 하음에서 하(河)자와 간점에서 점(岾)자를 따서 하점면이라 하였다.</p>
<h4><strong>신봉리(新鳳里)</strong></h4>
<p>옛부터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말, 신촌동(新村洞)이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신촌동에서 신(新)자와 봉상동(鳳祥洞)에서 봉(鳳)자를 따서 신봉리라 하였다.</p>
<p><strong>가막내</strong> : 봉천산 서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이강리 앞 뜰을 거쳐 가막다리 밑으로 흐르는 내에서 유래되었다.</p>
<p><strong>각곡(角谷)</strong> : 옛 하음현 터가 있던 마을로 양편에서 산줄기가 내려와 황소의 뿔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곡촌(谷村)</strong> : 봉천산 서남쪽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곡촌이라 하였으며 속칭 골말이라 부른다.</p>
<p><strong>교촌(校村)</strong> : 본래는 다섯개의 우물이 있어 오수물이라 칭하다가 1922년 하점보통학교가 들어 서면서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으로 부른다.</p>
<p><strong>봉상동(鳳祥洞)</strong> : 개화기에 새로 등장하였던 지명으로 봉은 신령스러운 상상의 새이므로 상서로운 곳이란 뜻으로 명명한 듯 하다.</p>
<p><strong>봉천산(鳳天山)</strong> : 고려때 하음백 봉천우가 봉천대를 쌓고 그 조상을 도우신 하늘에 제사를 지낸 산이라 하여 봉천산이라 부르며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있었다.</p>
<p><strong>소개(鳶峙)</strong> : 신봉리 새말에서 양사면 덕하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산이 오뚝하게 높은 곳에 있는 고개로 소개라 부른다고 한다.</p>
<h4><strong>장정리(長井里)</strong></h4>
<p>고려시대에 하음 봉씨의 시거지(始居地)라는 마을로 그들이 마시고 살던 긴우물이 있어 장정리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도간이(都間谷)</strong> : 장정 마을과 수월하 마을 사이에 있고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 순수 우리말인 독안에서 취음한 것으로 추정된다.</p>
<p><strong>봉은사(奉恩寺)터</strong> : 고려때 평장사로 하음백에 봉한 봉천우가 그의 5대 선조인 봉우의 발상지를 기념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지은 절이라 봉은사라 불렀다고 한다. 일명 장정리 사지라고도 한다.</p>
<p><strong>수월하(水月下)</strong> : 예전에 이곳에 수월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아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장곡(長谷)</strong> : 긴우물골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장곡이라 하였으며 장골이라고도 한다.</p>
<p><strong>종촌(鍾村)</strong> : 수월하 동북쪽 송해면 양오리와 경계에 있는 마을로 영암 종씨가 많이 살아 종촌이라 부른다.</p>
<p><strong>탑산골</strong> : 긴우물골 북서쪽 봉천산 밑에 있는 골짜기로 고려때의 오층석탑이 있어 탑산골이라 부른다.</p>
<h4><strong>부근리(富近里)</strong></h4>
<p>부근리는 예전 부근동(附近洞)으로 옛 하음현의 고을이 들건너에 있어 고을 부근에 있는 마을에서 유래된 듯 하며 부근동(富近洞)은 전의 부근동에서 음만 딴 것으로 추정된다.</p>
<p><strong>대촌(大村)</strong> : 큰 부근이 윗부근이로 부르는 마을로 부근리의 모체가 된 큰말이라 대촌으로 부른다.</p>
<p><strong>봉가지(奉哥池)</strong> : 부근리 420번지 안정골에 있는 못으로 고려때 하음 봉씨의 시조 탄생에 관한 전설이 서려있는 못으로 봉가지라 하였으며 봉정(奉井)으로도 부른다.</p>
<p><strong>사직곡(社稷谷)</strong> : 큰 부근이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하음현의 사직단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사직골 또는 새작골로도 부른다.</p>
<p><strong>소목골</strong> : 대촌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소의 목처럼 생겨 소목골이라 부르며 창원 황씨가 많이 살아 황촌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안정곡(鞍靜谷)</strong> : 마을의 모양이 소의 안장처럼 생겨 안장곡이라 부르다가 안정곡으로 변하였다고 한다.</p>
<p><strong>치마대(馳馬臺)</strong> : 백련사 남쪽 고려산에 있는 터로 고구려때 연개소문 장군이 이곳에서 말을 타며 무예를 닦았다하여 치마대라 부른다고 전해진다.</p>
<p><strong>하누재</strong> : 백련사 동남쪽에서 강화읍 국화리의 청련사를 왕래하는 고개로 하늘에 맞닿은 것 같이 높아 보여 하누재라 부른 듯 하다.</p>
<h4><strong>삼거리(三巨里)</strong></h4>
<p>고려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세줄기의 시내가 있어 이 마을을 지나려면 세 번이나 냇물을 건너야 한다고 하여 삼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삼거동 일부를 신봉리에 이속시키고 삼거리라 하였다.</p>
<p><strong>삼거천(三巨川)</strong> : 고려산으로부터 마을 앞으로 큰 시냇물이 세줄기가 흘러 합쳐진 시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삼태곡</strong> : 망잿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삼태처럼 생겨 삼태곡이라 부르며, 삼탯골로도 부른다.</p>
<p><strong>소동(小洞</strong>) : 신봉리 각곡에서 이 마을을 보면 소 죽통같이 보이고 저녘 햇빛이 많이 쪼이는 곳이라 소죽양이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작은마을이란 뜻으로 소동이라 하였다.</p>
<p><strong>천곡(泉谷)</strong> : 시거리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골이 깊어 샘물이 사철 흘러 내려와서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어 천곡이라 부르며 샘골이라고도 한다.</p>
<p><strong>천촌(泉村)</strong> : 샘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좋은 샘물이 있어 천촌이라 하였으며 샘말이라고도 부른다.</p>
<h4><strong>신삼리(新三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간점면 신성동(新城洞)에 삼거동(三巨洞)을 합하여 신삼리라 하였다.</p>
<p><strong>동촌</strong> : 동촌은 옛 신성동 서촌은 작은 시거리를 말하며 신삼리 중심지에서 보아 동쪽은 동촌, 서쪽은 서촌이라 하였다.</p>
<p><strong>매저루</strong> : 신삼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 뒷산에 매곡사란 절이 있어 매저루라 부른다고 한다.</p>
<p><strong>바랑골</strong> : 서촌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바람이 세어 바람골이라 하였는데 뒤에 바랑골로 변하였다고 한다.</p>
<p><strong>쇳돌구뎅이</strong> : 돌 수산골 안에 있는 골짜기로 쇠가 났는데 질이 나빠 화문석 매는 고드렛돌을 만들었다하여 쇳돌구뎅이라 한다.</p>
<p><strong>신성동(新城洞)</strong> : 조선후기에 새로 생겼던 지명으로 새로 조성되었다는 뜻으로 사용한 듯 하며 지금의 동촌을 말한다.</p>
<p><strong>피랏골</strong> : 신성동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피밭골 즉, 피를 심던 밭을 말하며 와전되어 피랏골이라 부른다.</p>
<h4><strong>망월리(望月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원래의 외가면 소속이었으나 신설된 하점면과 통합하면서 산곶동과 합하였고 마을이 벌판 가운데 있어 달뜨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고 하여 망월리라 부른다.</p>
<p><strong>갈마산(渴馬山)</strong> : 다운이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감낙골</strong> : 미꾸지 남쪽 산밑에 있는 마을로 감나무가 많아서 감낙골이라 부른다.</p>
<p><strong>검지물</strong> : 미꾸지 북쪽에 있는 마을로 큰 우물이 있어 검지물이라 하였다.</p>
<p><strong>고백산</strong> : 미꾸지 동쪽 산으로 산 오르막이 매우 경사가 심해 마치 콧등과 같다고 하여 ‘코백’이라 하다가 ‘고백’으로 변한것이라 한다.</p>
<p><strong>다운(多雲)</strong> : 옛부터 마을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끼어 다운이라 부르고 있다고 전한다.</p>
<p><strong>만리성(萬里城)</strong> : 망월리와 창후리에 걸쳐 해변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외성으로 성이 길어 만리성이라 부른다.</p>
<p><strong>미꾸지</strong> : 망월리 동남쪽 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p>
<p><strong>산화(山花)</strong> : 낙조봉 서쪽 줄기가 길게 뻗은 곳에 있는 마을로 산곶(山串) 즉 뫼곶으로 산화는 뫼곶과 같은 뜻이며 속칭 미꾸라지라고 부른다.</p>
<p><strong>정창구렁</strong> : 다운 마을과 신삼리 서촌 경계에 있는 구렁으로 부근에 욕심이 많고 인색한 정첨지가 살았는데 어느날 도승이 찾아와 이 길을 뚫어 길을 내면 앞으로 더 큰 부자가 되리라고 하여 그 말대로 구렁을 뚫어 길을 내고 망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정창구렁이라 부른다.</p>
<p><strong>하망월(下望月)</strong> : 망월벌 아래쪽에 있어 하망월이라 부르며 아랫말로도 부른다.</p>
<p>해나무우물 : 하망월 동녘말과 서녘말 사이에 있는 우물로 우물가에 해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호랭이바위</strong> : 다운 남쪽에 있는 바위로 호랑이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창후리(倉後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간점면 창교동(倉橋洞)에 강후동(江後洞) 일부를 합하고 창교동에서 창(倉)자와 강후동에서 후(後)자를 합하여 창후리라 하였다.</p>
<p><strong>홍각시골</strong> : 홍각시묘가 있는 골짜기라 붙여진 이름이며 예전에 충청남도 보령의 이씨 신랑과 이강리 홍씨 신부가 혼약을 맺었는데 신랑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는 흉보를 듣고 뒷산에 올라 남쪽을 보고 통곡하다 자결하여 신랑 집안에서 이 소식을 듣고 아들의 시체를 보내어 합장하였으며 산소 양옆에 큰바위가 있었는데 산소를 쓴 후 붉고 초록색 이끼가 끼어 마치 신랑 신부의 차림새처럼 보여 인근 사람들이 신랑 신부의 넋이 나타난 것이라 하여 신랑 각시바위라고 부른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p>
<p><strong>뒷물</strong> : 뒤에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뒷말이라 부르다가 와전되어 뒷물이라 부르며 후정 또는 뒤우물이라 부른다.</p>
<p><strong>별립산(別立山)</strong> : 산이 산맥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있는 산이라 하여 별립산이라 하고, 또한 벼락산, 별악산이라고도 한다.</p>
<p><strong>벌말</strong> : 창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막집이 있었고 갯벌이 있는 마을이라 벌말이라 불렀다.</p>
<p><strong>빙구모팅이</strong> : 사탯말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 빙고(氷庫) 즉 얼음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사촌(沙村)</strong> : 홍수가 나면 산사태가 심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속칭 사태말이라 부른다.</p>
<p><strong>장사바위</strong> : 별립산에 있는 바위로 옛날 천하에 이름을 떨칠만한 남장사와 여장사가 바위에 앉았다가 일어서며 바위에 선을 그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여 장사바위라 부른다고 전한다.</p>
<p><strong>저릅산석굴</strong> : 별립산 남쪽에 있는 석굴로 별립산을 저릅산이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저운동고개</strong> : 미럭굴 북쪽에서 양사면 인화리 저운동을 왕래하는 고개라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이강리(梨江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종전 이현동(梨峴洞)에 강후동(江後洞)의 일부를 합하고 이현동에서 이(梨)자와 강후동에서 강(江)자를 따서 이강리라 하였다.</p>
<p><strong>가마구다리(烏橋)</strong> : 함촌말 남쪽 삼거촌에 있는 다리로 하점면의 복판에 있어 까마득하게 멀리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하점교라고도 부른다.</p>
<p><strong>강말</strong> : 성경 남쪽 길가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여 강말이라 부른다.</p>
<p><strong>모현(茅峴)</strong> : 띠풀이 많이 나는 마을이라 모현이라 하며 뜨재라고도 한다.</p>
<p><strong>배우고개</strong> : 이강리 동북쪽에서 인화리를 왕래하는 고개로 옛날 배나무가 많아 배고개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p>
<p><strong>삿갓추리</strong> : 이 마을은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 산맥 중심부에 집을 지어야 잘 산다는 전설이 있어 집을 지었는데 중심부에서 벗어나지 않는 곳에 계속 새로 지어 지붕이 맞닿아 마치 삿갓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이현(梨峴)의 속칭이다.</p>
<p><strong>선우물</strong> : 선우물골에 있는 약샘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선채로 맞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풍병에 신효하다고 한다.</p>
<p><strong>성경(城境)</strong> : 성경대라는 활터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며 강서중학교 부근 일대의 마을이다.</p>
<p><strong>함촌(咸村)</strong> : 강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함씨가 많이 살아 함촌이라 하며 강후동으로도 부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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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사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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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0:35:26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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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양사(兩寺)란 두 개의 절이란 뜻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때 서사면과 북사면을 합쳐서 양사면이라 칭하였다. 철산리(鐵山里)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조선시대에 철곶보가 있던 철곶(鐵串)과 포구마을인 산이포(山伊浦)와 합하고 철곶에서 철(鐵)자와 산이포에서 산(山)자를 따서 철산리라 하였다. 널다리 : 산이포 동남쪽에 나무로 놓은 다리라 널다리로 불렀으며 1965년 콘크리트로 새로 놓고 철산교라 한다. 산이포(山伊浦) : 철산리 동남쪽 해변가에 있던 포구마을로 예전에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양사(兩寺)란 두 개의 절이란 뜻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때 서사면과 북사면을 합쳐서 양사면이라 칭하였다.</p>
<h4><strong>철산리(鐵山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조선시대에 철곶보가 있던 철곶(鐵串)과 포구마을인 산이포(山伊浦)와 합하고 철곶에서 철(鐵)자와 산이포에서 산(山)자를 따서 철산리라 하였다.</p>
<p><strong>널다리</strong> : 산이포 동남쪽에 나무로 놓은 다리라 널다리로 불렀으며 1965년 콘크리트로 새로 놓고 철산교라 한다.</p>
<p><strong>산이포(山伊浦)</strong> : 철산리 동남쪽 해변가에 있던 포구마을로 예전에 포촌동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산이포로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휴전선으로 모두 이주 폐동되었다.</p>
<p><strong>옥녀봉</strong> : 산 봉우리 모양이 처녀의 예쁜 유방과 비슷하며 이곳에서 옥녀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천신(泉新)</strong> : 산이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엔 천진이란 나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통행할 수 없으며 새로 생긴 마을에 옛 천진의 천(泉)자를 살려 천신으로 부르고 있다.</p>
<p><strong>형제바위</strong> : 철곶 북쪽에 있는 바위로 크고 작은 바위 2개가 형제처럼 나란히 있어 형제바위라 부른다.</p>
<h4><strong>덕하리(德下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북사면 덕현동(德峴洞)에 군하동(郡下洞) 일부를 합하고 덕현동에서 덕(德)자와 군하동에서 하(下)자를 취하여 덕하리라 하였다.</p>
<p><strong>군하동(郡下洞)</strong> : 예전에는 조수가 드나들던 머리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군두동(群頭洞)이라 부르다가 뒤에 없어졌고, 아랫마을이라 군하동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p>
<p><strong>덕고개</strong> : 덕현동에서 교산리를 왕래하는 고개로 덕현동에서 덕자를 따서 덕고개라 부른다.</p>
<p><strong>덕하천(德下川)</strong> : 봉천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덕하리를 지나 산이포에서 바다로 흐르는 내라 덕하천이라 부른다.</p>
<p><strong>덕현동</strong> : 덕현동은 고어로 가파른 고개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p>
<p><strong>도덕바위</strong> : 백마산 아래에 있는 바위로 도둑이 숨어 있다가 지리고개를 왕래하는 행인을 괴롭혔다하여 도덕바위라고 부른다.</p>
<p><strong>백마산(白馬山)</strong> : 덕하리와 양오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허리에 흰모래가 많아 멀리서보면 백마와 비슷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strong>양촌(陽村)</strong> : 양촌은 양달말에서 유래되었으며 큰 양달말을 대양촌, 작은 양달말을 소양촌이라 부른다.</p>
<p><strong>오촌말(吳村洞)</strong> : 양달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오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p>
<p><strong>응달말</strong> : 덕하리의 응달쪽 마을이라 하여 응달말이라 부르며 음촌, 음짓말이라고도 한다.</p>
<p><strong>함바위</strong> : 덕하리에 있는 바위로 두드리면 함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고하여 함바위라 부른다.</p>
<p><strong>황골</strong> : 봉천산 북쪽골에 있는 마을로 크다는 뜻의 고어 한과 골(谷)의 합성어로 한골 &#8211; <strong>항골</strong> &#8211; 황골로 변화한 것 같다.</p>
<h4><strong>북성리(北省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원래 북사면 북정동(北井洞)에 삼성동(三省洞)을 합하고 북정동에서 북(北)자와 삼성동에서 성(省)자를 취하여 북성리라 하였다.</p>
<p><strong>구등곶(龜登串)</strong> : 생설미 서북쪽 끝에 있는 곶으로 거북처럼 생겼다하여 구등곶이라 부른다.</p>
<p><strong>별악산</strong> : 북성리 남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암지네와 숫지네가 살았는데 어떤 사람이 숫지네를 죽이니 암지네가 복수하려고 돌을 높이 쌓았을때 벼락이 떨어져 무너졌다는 전설에 따라 별악산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p>
<p><strong>말미(馬尾)</strong> : 오댓골 남쪽 말머리 밑에 있는 마을이라 말미라고 하며 몰미라고도 부른다.</p>
<p><strong>북정동(北井洞)</strong> : 예전에 찬우물이 있어 냉정동(冷井洞)이라 부르다가 1895년 이후부터 북쪽 우물마을이란 뜻으로 북정동으로 고쳐 불렀다.</p>
<p><strong>생설미</strong> : 이곳에 삼성당(三省堂)이란 당집이 있어 붙인 지명이며 생설미는 삼성미의 다른 이름이다.</p>
<p><strong>오댓골</strong> : 욧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에 다섯 집이 있었다고 하여 오댓골이라 부른다고 전한다.</p>
<p><strong>요곡(瑤谷)</strong> : 전래부터 욧골이라 불러오고 있는 마을로 옛날에 바닷물이 마을앞을 돌아 흐르는만이 있던 데서 유래된 듯 하다.</p>
<h4><strong>교산리(橋山里)</strong></h4>
<p>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서사면 교항동(橋項洞)에 증산동(甑山洞)을 합하고 교항동에서 교(橋)자와 증산동에서 산(山)자를 따서 교산리라 하였다.</p>
<p><strong>덕응(德凝)</strong> : 덕고개부터 응곡마을까지 이르는 마을이라 하여 덕응 또는 덕궁(德窮)이라 부른다.</p>
<p><strong>묵곡(墨谷)</strong> : 묵곡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검골로 신을 섬기던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듯 하다.</p>
<p><strong>신포(新浦)</strong> : 예전에 중국 상선이 이곳에 기착한 후 새로 포구가 생겨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포라 부른다.</p>
<p><strong>음곡(陰谷)</strong> : 응달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 음곡 또는 응곡으로 칭한다.</p>
<p><strong>증산(甑山)</strong> : 산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에서 마을이름을 증산이라 부른다.</p>
<h4><strong>인화리(寅火里)</strong></h4>
<p>인화석진(寅火石津)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범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 나루터 마을이란 뜻으로 인화리라 명명한 듯 하다.</p>
<p><strong>남시랑(南侍郞)</strong> : 큰말과 닭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남시랑이 살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p>
<p><strong>닭바위</strong> : 송산 서쪽에 있는 바위로 이름난 지관이 금계포란형의 명당을 잡아주면서 석자세치를 파면 반석이 나올 터이니 그 반석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쓰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지않고 반석을 건드리자 금닭이 나와 울더니 이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득남한다고 전한다.</p>
<p><strong>송산(松山)</strong> : 전들 동북쪽 산밑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산이라 하였으며 솔미라고도 부른다.</p>
<p><strong>범바우(虎岩)</strong> : 당산밑에 있는 바위로 범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며 남쪽을 향하고 있어 인화석이라고도 부른다.</p>
<p><strong>전들</strong> : 인화석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이 있다고 하여 전돌이라 하였으나 와전되어 전들이라 칭하고 있으며 저운동으로도 부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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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송해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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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관리자]]></dc:creator>
		<pubDate>Fri, 12 Jun 2020 00:25:47 +0000</pubDate>
				<category><![CDATA[강화 지명의 유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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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시대 이래 송정포(松亭浦)의 이름을 따서 송정면(松亭面)으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송정면(松亭面)과 삼해면(三海面)을 병합하고 송정면에서 송(松)자와 삼해면에서 해(海)자를 따서 송해면이라 칭하였다. 솔정리(率丁里) 예전에 이곳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 솔정동(率亭洞)이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 마을에 나주 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어 정씨가 거느리는 마을이란 뜻으로 솔정리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간촌(間村) :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송정면과 삼해면을 통합하면서 두면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조선시대 이래 송정포(松亭浦)의 이름을 따서 송정면(松亭面)으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송정면(松亭面)과 삼해면(三海面)을 병합하고 송정면에서 송(松)자와 삼해면에서 해(海)자를 따서 송해면이라 칭하였다.</p>
<h4><strong>솔정리(率丁里)</strong></h4>
<h4>예전에 이곳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 솔정동(率亭洞)이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 마을에 나주 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어 정씨가 거느리는 마을이란 뜻으로 솔정리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h4>
<p>간촌(間村) :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송정면과 삼해면을 통합하면서 두면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간촌이라 부르며 속칭 샛말이라 한다.</p>
<p>대마촌(大馬村) : 솔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을 대촌으로 불러 왔는데 일제강점기 때에 이웃 하도리에도 대촌이 있어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마두촌의 마자를 붙여 대마촌이라 하였다.</p>
<p>마두촌(馬頭村) : 마을의 모양이 말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마두촌이라 부른다고하며 일설에는 마을앞 논뚝에 말무덤이 있어 마두촌이라 칭하였다고도 한다.</p>
<p>알미정 : 샛말 뒤에 있는 산이 알처럼 둥그렇게 생겨 알미정이라 하였으며 앨미동산으로도 부른다.</p>
<p>정감물(丁家水) : 나주 정씨가 집단 거주하며 사용하는 우물이라 정가우물이라 부르다가 정감물로 되었다고 한다.</p>
<p>중앙보(中央洑) : 마두촌에서 상도리로 가는 길위에 있는 보로 두 마을 가운데 있다하여 중앙보라 부른다.</p>
<h4><strong>신당리(申唐里)</strong></h4>
<h4>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신성동(申城洞) 일부와 부내면 당주동(唐州洞) 일부를 합한 후 신성에서 신(申)자와 당주에서 당(唐)자를 따서 신당리라 하였다.</h4>
<p>기당재 : 신당리에서 강화읍 관청리로 질러가는 고개로 예전에 고을에서 기우재를 지내던 기우청제단이 있어 기당재라 부른다.</p>
<p>온수골 : 중촌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이곳에 온수사란 절이 있었고 그 앞에서 온수가 난다고 하여 온수골이라 부른다.</p>
<p>중촌(中村) : 신당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라 중촌이라 부르며 가운데 마을이라고도 한다.</p>
<p>한직골 : 찬 샘물이 흘러나오는 곳이라 한직골이라 칭하며 서촌에서 간이 상수도를 만들어 식수로 사용하였다.</p>
<p><strong>하도리(下道里)</strong></p>
<p>고려산 북쪽 산줄기 밑에 젓고개라는 언덕과 동리가 있었는데 강화읍에서 하점면 방면으로 연결하는 도로가 개통 한 후 길가에 동리가 생겨 젓고개 사람들이 아랫길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하도리라 칭하였다고 한다.</p>
<p>김작촌(金雀村) : 옛날 이 마을에 고목나무가 많아 봄이면 꾀꼬리 새떼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김작촌이라 부르며 속칭 김작골이라 한다.</p>
<p>구름다리(雲橋) : 국도 48호선 오류천에 놓은 높은다리를 구름다리라 하였으나 지금은 새로 놓아 하도교라 부른다.</p>
<p>무지락골 : 큰비가 오거나 소나기가 지나가면 생수우물에 무지개가 꽂혀 무지락골이라 부른다.</p>
<p>삼거촌(三巨村) : 김작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국도 48호선이 지나는 세 갈래 큰길이 있어 삼거촌이라 하였으며 속칭 삼거림으로 부른다.</p>
<p>알동산 : 오류내 가운데 있는 동산으로 금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어서 알동산이라 부른다고 한다.</p>
<p>약방골 : 송해파출소 뒤쪽으로 올라가면 마을 사람들이 먹던 우물이 있는데 이 물을 먹고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낫는다고 하여 이 골짜기 마을을 약방골이라 부른다.</p>
<p>오류촌(五流村) : 다섯 개의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려 내를 이룬 마을이라 하여 오류촌이라 부르며 속칭 오류내라고 한다.</p>
<p>젓고개 : 오류내와 김작골을 왕래하는 고개로 예전에 새우젓배가 이 고개 밑까지 들어왔다고하여 젓고개로 부른다고 전한다.</p>
<h4><strong>상도리(上道里)</strong></h4>
<p>송정포구(松亭浦口)에서 강화읍으로 통하는 도로 위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상도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송정면 숭뢰리 일부와</p>
<p>삼해면 상도동 일부, 당산동 일부를 합하여 상도리라 하였다.</p>
<p>경연(慶筵)터 : 선조때 권필이 홍의에 살면서 그의 아들 항(伉)이 사마시에 뽑혀 잔치를 베푼 자리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다송현(多松峴) : 상도리와 숭뢰리 금곡마을을 왕래하는 고개로 예전에 이 고개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다송현이라 칭하였으며 속칭으로 다솔개라 부른다.</p>
<p>송곡촌(松谷村) : 마을이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부터 소나무가 무성하여 송곡촌이라 부른다.</p>
<p>호박촌(琥珀村) : 홍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금광이 있어 호박이라는 보석이 나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속칭 호박골이라 부른다.</p>
<p>홍의(紅衣) : 마을모양이 기러기와 비슷하고 마을 앞 큰 방죽에 기러기 철새들이 많이 날아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여 홍우(鴻羽)로 부른데서 유래되었으며 속칭 홍이라 한다.</p>
<h4><strong>숭뢰리(崇雷里)</strong></h4>
<p>옛날 이곳에 숭릉(崇陵)이라는 능이 있었다하여 숭릉동이라 하였는데 1894년 숭릉동에 뇌곶동(雷串洞)을 폐합하고 두동에서 한글자씩 따서 숭뢰동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포촌동을 합하여 숭뢰리가 되었다.</p>
<p>금곡(金谷) : 임송굴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뒤편에 금동산이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금골 또는 금굴로도 부른다.</p>
<p>대변청(待變廳) : 예전 대변창이 있던 마을이라 대변창이라 부르다가 대변청으로 변하였다.</p>
<p>송정(松亭) : 우뢰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 송정이라 하였으며 곡촌(谷村)으로도 부른다.</p>
<p>우뢰(雨雷) : 숭뢰리 해안가에 있는 마을로 비가 내리면 벼락이 많았으며 그 원인이 뇌성에서 온다고 하여 우뢰라 부른다고 한다.</p>
<p>임송골(林松村) : 낭터림 서쪽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 숲속에 마을이 있어 임송골이라 부른다.</p>
<p>전좌촌(殿座村) : 우뢰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고종이 강화로 피난 천도시 이곳에서 전좌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h4><strong>양오리(陽五里)</strong></h4>
<p>산 능선을 따라 다섯 개의 자연부락이 이루어져 있어 오향지기(午向之氣)라 양(陽)자와 오(五)자를 합하여 양오리라 부른다고 전한다.</p>
<p>간촌(間村) : 양오리의 가운데 마을로 서쪽에는 김지곡이 북쪽으로는 큰 양오리가 있어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촌이라 부르며 한촌말이라고도 칭한다.</p>
<p>간드랑바위 : 김지곡 서쪽 고욤산에 있는 바위로 작은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있어 조금만 건드려도 간드랑 거린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관곡(官谷) : 예전에 이 마을에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관곡이라 부르고 있으나 와전되어 강골로도 부른다.</p>
<p>김지곡(金芝谷) : 큰 양오리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는 금동산이 있어 지금도 금을 캐던 흔적이 남아 있고 마을모양이 V자형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하여 김지곡이라 부른다.</p>
<p>모름말 : 예전에는 천계가 넓어 마을안까지 선박이 출입하였는데 마을에 모래가 많다고하여 모래말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모름말로 칭한다고 한다.</p>
<p>삼형제바위 : 풍류산 동쪽 봉우리에 있으며 옛날 효행과 우애가 지극한 삼남매가 황해도 앞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를 기다리며 가난한 살림에 먹을 것이 없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산나물을 캐러갔다가 아사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바위로 그 형상이 마치 세아이가 끌어 안고 있는 듯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p>
<p>큰 양오리 : 양오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큰 양오리라 부른다.</p>
<p>하고개 : 김지곡 남쪽에서 하점면 장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하고개라 부른다.</p>
<h4><strong>당산리(堂山里)</strong></h4>
<p>마을 뒤 조그만 산위에 신에게 제사지내던 당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당산동에 종전 하음면 양오리 일부를 편입하여 당산리라 하였다.</p>
<p>내곡촌(內谷村) : 마을이 골짜기 안에 있어 안골 마을이라 부르다가 내곡촌으로 칭한다.</p>
<p>당산(堂山) : 상도촌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신당이 있었다 하여 당산이라 부른다.</p>
<p>상도촌(上道村) : 당산리 서북쪽 양사면으로 가는 길위에 있는 마을이라 상도촌으로 부르며 양천 허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허촌말이라고도 한다.</p>
<p>양촌(陽村) : 당산리 바닷가에 있는 낮은산의 양지쪽에 자리하고 있어 양지촌이라 하였으며 반남 박씨가 많이 살아 박촌말이라고도 부른다.</p>
<p>열녀각(烈女閣) : 고종때 젊은 부부가 살다가 남편이 죽자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애통히 여기고 남편의 삼년상을 마친 뒤 남편이 죽은날 같은 시각에 자결하였다고 하여 나라에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열녀각을 세워 널리 칭송하였다.</p>
<p>풍류산(風流山)약수 : 당산리 산20-1번지 풍류산에 있어 풍류산약수라고하며 특히 풍병에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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