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독립운동 유적지

Ο 김동수·김남수·김영구 3형제 순국지

1905년 3월 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는 지방전도사인 김우제를 통하여 감리교에 입교하고 강화잠두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동휘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7월 24일 강화읍내 연무당에서 기독교도인 김동수, 김남수 형제, 허성경, 김광천, 김기약 등과 군중집회를 열고 격렬한 배일연설을 하였다.
7월 26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대한자강회총회를 열고,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김동수, 허성경 등 기독교도와 해산된 군인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를 결성하고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었다. 이후 8월 9일 강화군민의 봉기가 일어나자 수원의 일본군은 11일 강화에 도착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다. 갑곶진 전투에서 50여 명이 사살되는 등 피해가 속출하는 동안 일진회원들의 제보로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되었다. 일본군은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3형제를 압송하는 중 더리미에서 살해하였다.

Ο 강화잠두교회 항일운동지

1905년 3월 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李東輝)는 지방전도사인 김우제를 통하여 감리교에 입교하고 강화잠두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후 1907년 군대 해산이 되자, 이동휘는 7월 24일 강화읍내 연무당에서 기독교도인 김동수·김남수형제, 허성경·김광천·김기약 등과 군중집회를 열고 격렬한 배일연설을 하였다.
7월 26일에는 연무당에서 대한자강회총회를 열고,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김동수·허성경 등 기독교도와 해산된 군인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었다.
이후 8월 9일 강화군민의 봉기가 일어나자 수원의 일본군은 8월 11일 강화에 도착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다. 갑곶진 전투에서 50여 명이 사살되는 등 의병측 피해가 속출하는 한편,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이 포위를 하였다. 그리고 일진회원들은 주모자 이동휘 등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전 강화진위대원이었던 김동수 권사 3형제를 유인하여 압송하는 중 선원면 더리미에서 살해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강화읍 만세운동은 후 조구원을 비롯한 강화잠두교회 청년교인 6명 등은 강화읍교회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독립운동 격문을 부착하고, 자유민보 등 10여 종류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읍내 상인들에게 철시를 종용하였으며, 경찰로 근무하는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는 등 활동을 벌이다 4월 20일 체포되었다.

 


Ο 선두리교회 독립선언서 인쇄지

초대교회

1919년 3·1만세운동의 여파로 시작된 강화군민의 만세운동을 위해 선두리교회 황유부 전도사의 집에서 황도문·유경호·염성오·황도성 등은 황유부가 갖고 있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수백 매를 인쇄하였다.
황도문은 더불어「강화인민에게」라는 문서와 독립가를 작성하여 인쇄하였다. 항일문서는 염성오를 통해 주로 배포되었는데, 황용근을 통해 15일 하도면 상방리의 교회 전도사 김양권, 문산리의 서당교사 박기천에게 문서를 전달하였다. 또 자신의 누이를 통해 불은면 두운리, 선원면 창리, 송해면장 고성근 등에게 배포하였다. 황윤실은 황유부로부터 양도면 삼흥리 강문호 목사, 능내리 이정갑에게 전달하였다. 읍내에는 국화리 거주 감리교회 전도부인 김유의가 독립선언서 등을 전달받아 부내면 국화리 게시판에 17일 밤 게시하는 등 조직적으로 독립문서를 도내에 전달하였다.


Ο 옛 양사면사무소 터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1일 강화군 송해면, 하점면, 양사면 여러곳에서는 각각 100여명의 군중이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2일에도 양사면 철산리에는 기독교도와 주민 150여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던 사실이 확인된다.
양사면의 만세운동은 1년 후인 1920년에도 확인된다. 1920년 7월 15일(음력)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주민 오용진과 임두엽은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오용진과 임두엽은 같은 마을에 사는 임학순(林鶴淳)의 집에서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고, “조선독립만세! 슬프도다, 슬프도다!”라는 글귀를 적어서 이를 철산리 장마당에 붙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독립벽보에는 ‘독립만세 광고 : 이것은 독립에 대한 발언이다. 이 글을 보고서 노소를 불문하고 음 7월 20일에 만세를 부르라. 이 말에 불응하는 자는 새나 짐승에 가까운 자이다’라는 글을 적었다. 이어 그 날로 양사면 철산리의 여러 사람 눈에 띄기 쉬운 중앙광장 게시판에 붙였다.
이들은 황준실과 함께 군중을 규합하여 8월 초순 경 양사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양사면사무소에서 백지에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만세” 4글자를 쓰고는 “우리 조선동포는 이 글을 보라. 애통한 마음은 누구나 있다. 이 마음이 없는 자는 새나 짐승과 다름이 없다. 애국심을 모르는가.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다’”고 하며 민족의 기개를 펼쳤다. 이 시위로 인하여 오용진과 임두엽, 임학순은 각기 1년형을 언도 받았다.

Ο 철산리 3·1운동 만세시위지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는 연평도 조기시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이곳은 1908년 의병과 일본군 간의 전투로 의병 7명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1919년 강화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이 각 면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에서는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40분부터 12시까지 수백명의 군중들이 양손에 등불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Ο 보창학교 터

1904년 당시 보창학교

사립보창학교는 1904년에 8월에 강화 진위대 대대장 이동휘가 읍내 선교계 사립학교들의 영향을 받아 국민개학의 뜻을 이루고자 설립한 육영학교에서 출발했다. 이동휘는 1905년 3월에 군직에서 물러났고 읍내 잠두교회에서 기독교 감리교로 개종한 후 강화지역 교육진흥운동에 매진했다.

이어 5월에 고종은 보창학교라는 교명과 내탕금을 하사하였고 경리원에서도 학교 재정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보창학교는 설립된 지 2년 안에 초등․고등소학과, 보통과, 여학과, 사범과 및 어학과정을 신설하여 강화지역의 주요 학교로 자리잡았다.

1907년 여름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1908년 2월에 다시 재건되었다. 이후 보창학교를 주축으로 한 강화지역 의무교육안이 마련되었고, 보창학교는 사범속성과와 중학과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1910년까지 강화지역 교육을 선도하였다. 하지만 1910년 병탄 이후에 재정난을 겪다가 1915년에 문을 닫게 된다.

보창학교 터는 강화군청 옆 현 강화교육청 미래교육지원센터 자리다.


Ο 교동 3·1운동 만세시위지

2019년 현재 교동 3·1운동 만세시위지 중 교동향교만 원형이 보존되어 있으며 교동읍성, 및 구 관아, 주재소 등 시위지역은 멸실되어 있다.

 


Ο 계명의숙 터

이건승은 이건창의 동생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보경, 호는 경재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자 1906년 강화도 사기리에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근대 민족교육을 시행했다. 계명의숙 설립에 참여한 인사는 이건방, 權炳孝, 李善宰, 朴憲用등이며, 초대 塾長이 이건승이다. 이건승은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정원하, 홍승헌, 안효재 등과 함께 만주의 회인현 홍도촌으로 망명하였다. 1910년 10월 이건승이 만주로 망명하고난 후 1915년 8월 고등과를 폐지하고 보통과를 운영하였다. 일제의 사립학교령에 따른 사학의 탄압과 학생수의 감소에 따라 1921년 폐교되었다.
계명의숙의 위치는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324번지로 현 중앙민박 자리이다

 

Ο 석포리 3·1운동 만세시위지

삼산면 석포리에서는 삼산면 서기 유경식(劉瓊植)이 숙부이자 성공회신자인 유석면(劉錫冕)과 상의한 후 김여원(金汝元), 김도경(金道經), 유복구(劉福龜), 한용암(韓容岩), 고복천(高福天) 등의 찬동을 얻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8일 오후 9시경 삼산면 석포리 성공회 교당 앞에서 주민 수십 명과 만세를 불렀다. 이어 밤 9시에는 교회당 뒤 산꼭대기에서 주민 20명이 함께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는 성공회 신자와 이 지역 감리교 학교의 교장 등 기독교인들이 연합하여 전개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10시경 경찰의 설득으로 해산했지만 동리의 시위는 9일과 10일에도 이어졌다. 4월 8일과 9일에 이어 4월 10일 밤에도 삼산면 석포리에서는 유경식이 주도하여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삼산면장 김동헌(金東憲)은 석포리 시위에는 어린 학생보다 성년이 많이 참가했다고 진술했다. 석포리의 시위는 석모리로 이어졌고 바다를 건너 양도면으로 옮겨갔다.

Ο 봉천산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 소식은 강화군에도 전해졌다. 당시 강화군에서는 읍내를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었고, 특히 강화 북서부 지역에서는 동시다발적인 만세시위가 이루어졌다. 3월 18일에는 20,000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27일에는 2,0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후 4월 1일에는 강화군 하점면 봉천산 봉천대(奉天臺)에서 주민 100여 명이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Ο 강화유격대 창설지

6·25전쟁 기간 동안 강화도는 국군 및 유엔군의 유격대 기지로서 중요한 곳이었다. 전쟁초기에는 반공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정의단, 민주청년반공돌격대, 일민주의청년단, 대한지하결사대, 강화치안대 등 자생적인 유격대를 조직하여 북한군에 맞서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공군이 참전한 후 1·4후퇴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 육군 첩보부대와 유엔군 제8240부대 소속 유격대들이 편성되어 활발하게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전에 자생적으로 활동하던 유격대들도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모두 육군 또는 유엔군 소속 유격대로 재편되어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하도리에서 창설된 강화유격대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개성·개풍군 출신 강화주민들로 구성된 부대로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조직되었다. 강화유격대는 북한군의 대병력을 상대로 하여 강화도 각 지역에서 다양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전과를 달성하였다. 이들의 유격활동은 강화지역을 사수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이들은 이후 육군 제5816부대로 편성되어 과감한 유격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Ο 갑곶 전투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육군본부는 김포가도상의 북한군 진출을 위해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육본은 계인주 남산학교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김포지구에 있는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도록 하였다. 계인주 사령관은 강화도에서 김포 방면으로 도하하는 적에 대비하여 부대 편성이 끝나는 대로 갑곶과 용수리 대안 일대에 기갑연대 도보대대와 보국대대 병력을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6월 26일 야간 북한군 제6사단은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갑곶과 용진포 일대배치한 후 김포반도로 도하할 기도를 보였다. 도하를 감행한 북한군은 이 곳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도보대대와 보국대대 진지를 침투·공격하였고, 양측간에는 치열한 격전이 전개되었다. 게다가 갑곶에서 도하를 노린 북한군의 일부가 염하수로를 건너 180고지 서쪽 하안으로 침투함으로써 방어선의 일부가 돌파되었다. 북한군이 진지 측면으로 침투하자 도보대대 병력들이 분산되기 시작하였고, 김포 일대의 방어진지가 돌파되면서 방어 병력들은 김포읍내로 철수하고 말았다


Ο  길직교회 3·1운동 만세시위 모의지

1919년 3월 9일 오후 3시경 길직리 예수교회당에서 길직리의 조종환(趙鍾桓)·장명순(張明淳)·장동원(張東元)·장상용(張相用)·장삼수(張三壽)·장흥환(張興煥) 등과 선두리의 황유부(黃有富)·황도문(黃道文)·염성오(廉成五)·유희철(劉熙哲), 온수리의 유봉진(劉鳳鎭), 상방리의 이진형(李鎭亨) 목사 등이 회합하였다. 이들은 길직교회와 선두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황도문과 조종환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관한 상황을 전하고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들은 돌아오는 장날 중 여건이 좋은 날을 정해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여러 번의 협의를 통해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고,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Ο 강화읍 3·1운동 만세시위지
강화 3·1운동은 강화읍내 전체를 배경으로 한 운동이다. 강화 3·1운동만세기념비는 1996년 은혜교회 앞에 조성되었다가 2011년 용흥궁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Ο 연무당 터

연무당(練武堂)은 1870년(고종 7)에 건립되어 무관병사를 열병(閱兵)하던 곳으로, 1876년에는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1907년 7월 24일 이동휘(李東輝)는 기독교도인 김동수·허성경·김남수 등과 강화읍 연무당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일본에 대항해 결사 항전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또한 7월 26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대한자강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Ο 강화보통학교 동맹휴학지

1919년 3월 12일 강화공립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은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며 운동장에 나가려 하였으나 교장과 교직원에 제지당했다. 학생들은 13일 다시 100여 명이 학교 안에서 만세를 불렀다. 경찰이 이들을 진압하고 남학생 10명과 여학생 반장을 연행하였다.
1925년 6월 강화공립보통학교 5학년 학생 70여 명이 훈도 이기하(李起夏)의 폭언과 부당한 실습 연장 요구에 저항하여 강화성 서문 누상에서 회합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1928년 6월에는 일본인 교장이 2학년 학생을 도둑으로 몰아 이틀간 구타하여 정신이상이 발병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강화지역 사회단체와 학부형 대표 등이 군청에 문제를 제기하여 일본인 교장을 징계토록 하였다.

Ο 합일학교 터

합일학교(合一學校)는 1901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조원시(趙元時, G.H.Jones)와 박능일 목사가 설립하였으며 강화 최초의 사숙(私塾)으로 시작하였다. 1909년 4년제로 인가받고 1923년 4월 신효승·최상현 두 사람의 노력으로 총 공사비 12,400원을 들여 2층 양옥을 신축하였다. 1924년 2월「신교육령」에 의해 6년제로 되었다.
1922년에는 감리교 선교회의 보조 중단으로 재정적인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강화지역 주민들의 모금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33년에는 일제가 공립학교를 설립하여 압력을 가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교장으로 취임한 최상현이 자신의 재산 상당분인 18만여 평의 토지(당시 싯가 70,000원 상당)를 기부하여 확고한 재정기반을 갖추었다.
합일학교는 보창학교, 계명의숙과 함께 강화를 대표하는 사학이었다. 합일학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보여주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교사인 강흥석이 일제 경찰에 불려가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 학교는 여학생과 유년교육에 앞장서 지역사회의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주민후원회와 확고한 재정 기반으로 투철한 항일민족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최상현 교장과 그 뒤를 이은 오영섭 교장은 모두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다.
1946년 11월 백범 김구는 김주경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 방문하였다. 김주경의 집 인근 합일학교에서 ‘김구선생’ 환영대회가 열렸고, 김구는 ‘홍익인간’휘호를 남겼다. 현재 김구의 휘호는 이범석의 ‘위국육재’ 휘호와 함께 교장실에 보관되어 있다.

Ο 박계석의병 활동지 – 하도리
박계석(朴啓石)은 강화 진위대 군인 출신으로 1907년 군대 해산 후 의병에 투신하였다. 1908년 4월에는 박정빈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창의돌격대장 김용기와 함께 강화도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그는 김덕순, 고부성, 지홍일 등과 함께 교동·개성·풍덕·배천·연안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 등을 벌였다.
1908년 7월 박계석과 고부성(高夫成)은 서문 밖 방골에서 일본헌병 보조원인 송대현과 그의 호위를 받던 일진회 회장 양학진을 사살하였다. 이들은 거사 직후 출동한 헌병에게 검거되었다. 1908년 11월 인천으로 압송 중 박계석은 하도리 부근 야산에서, 고부성은 갑곶 염하에서 총살되었다. 박계석은 1990년 건국헌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Ο 강화의병 주둔지 – 견자산
1907년 8월 9일 일제에 의해 강화 진위분견대가 해산되자, 대원들은 이에 저항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친일군수 정경수를 처단하였다. 강화진위대원들의 봉기에 주민들도 합세하여 대열은 약 8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위대원과 주민들은 무기고를 부수어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진위대 해산을 위해 용산에 주둔하였던 일본군이 출동하였다. 봉기군은 갑곶 인근 선착장 연안에 50여 명이 매복하여 총격을 가해 일본군 6명을 사살하고 5명을 부상시켰다. 화력에 밀려 읍내로 들어간 봉기군은 연기우·지홍윤·유명규 등의 지휘 아래 해서(海西)지방으로 탈주하였다.

Ο 대동창의병 전투지 – 죽실방죽

후대의 방죽 확장으로 선두포 항구는 없어졌으나, 방죽은 그대로 있다.

Ο 강화의병 전투지 – 전등사

전등사는 1907년 7월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가 김동수·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던 곳이다. 또 8월 2일에는 진위대원인 정기우, 지홍윤, 유명규, 김동수 등이 이곳에서 밀의를 했다.
전등사는 1907년 7월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가 김동수·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던 곳이다. 또 8월 2일에는 진위대 군인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김동수 등이 이곳에서 밀의를 했다.
전등사는 1908년 10월 말 이능권부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능권은 부내면 국정리 출신으로 시위대 장교였으나, 군대해산 후 낙향하여 주민들을 모아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친일파·밀정 등을 처단하고, 강화 전역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고 있었다.
1908년 의병의 항전이 이어지자 일본군은 같은 해 10월 용산주둔 일본군 6사단 예하의 13연대의 병력을 강화로 투입하였다. 이들은 10월 30일부터 전등사의 이능권부대를 공격했다. 이능권 부대는 이들을 급습하여 무기까지 탈취하였다.
일본군은 읍내로 퇴각하였고, 이능권부대는 31일 밤을 틈타 전등사에서 철수하였다. 일본군은 11월 1일 다시 전등사를 공격하였으나 이능권 부대는 이 미 퇴각한 뒤였다. 일제의 토벌작전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1월 5일 귀대하였다.
< 출처 : 독립기념관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