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산성(12개)

Ο 강화외성

강화 외성은 송해면 숭뢰리, 대산리·월곶리·옥림리·용정리·갑곶리, 선원면 신정리·지산리·연리, 불은면 고능리·오두리·넙성리·신현리, 길상면 초지리 등 1읍 4면 14리를 종단하고 북쪽으로는 적북돈(대산리 산1번지)에서부터 염하 해안가를 따라 휴암돈·월곶돈·제승돈·염주돈·갑곶돈·가리산돈·좌강돈·용당돈·화도돈·오두돈·광성돈·용두돈·손돌목돈·덕진돈을 경유하여 초지돈(길상면 초지리 624번지)까지 축조된 성으로서 둘레는 23만 225m이며, 수문은 21개이다.

대몽항쟁기에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여 몽골에 저항하였다. 강화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국가를 운영하였고, 이를 위해 내성·중성·외성 등을 축조하여 이중 삼중의 외침 방어시설을 형성하였다. 이 3성 중에서 내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중성과 외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 조정은 강화로 천도한 이후 궁궐을 신축할 때 내성을 축조하고, 이 궁궐을 보존하고 몽골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외성을 쌓았으며, 이후 중성을 쌓아 내외 방어시설을 보완하였다. 이 성은 1259년(고종 46)에 몽골의 요구에 의해서 모두 헐리게 되었다. 당시 고려의 백성들은 축성과 훼성의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으나 몽골이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여 결국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것은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성의 전략적 의미가 다시 부상되었다.

강화는 집권자들에 의해서 유사시 천도를 가상한 보장처로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륙으로부터 강화를 침략하는 외적의 방어를 위한 관방시설이 필요하였다. 1차 관방시설이 김포의 문수산성이었으며, 2차 관방시설이 바로 염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강화외성이었다. 1691년(숙종 17)에는 외성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옥포에서부터 초지에 이르렀던 당시 외성의 길이는 43리 200보였다. 그후 외성은 1718년(숙종 44)에 월곶돈에서부터 휴암돈까지 연장·증축되었다. 1742년(영조 18)에 시작해서 2년 동안에는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의 건의에 의해 전성(?城)으로 개축되었다. 1753년에는 무너진 전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있다.

가장 마지막에 남아 있었던 강화외성은 북으로 적북돈에서부터 남으로 초지진에 이르기까지 염하 해안선을 따라 축조된 성곽으로서 그 길이가 약 24km에 달한다. 현재는 석축이 대부분 붕괴되어 토성으로 남아 있으면서 석열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그러나 외성의 석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좌강돈대에서 가리산돈대 해안가 도로 방면이며 오두돈대 남쪽에 전성이 현존하고 있어 외성의 당시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Ο 강화중성 (향토유적 제1호)

이 성(성)은 고려 고종 37년 (1250)에 축조한토성이다. 이 중성의 총 길이는 약 6km이며 강화읍 옥림리 옥림고개로부터 시작하여 북산 정상에 이르렀고, 선원면 신정리로부터 창리, 대문고개를 거쳐 남산 정상에 이르렀다.

이 성문에는 7개의 성문을 설치하고 송도를 모방하여 이름을 지었다 한다. 정 동문은 선인문, 동남쪽은 장패문, 남쪽은 태안문, 서남쪽은 광덕문, 서쪽은 선기문, 서북쪽은 선의문, 북쪽은 북창문, 동북쪽은 창희문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Ο 강화내성(강화산성/사적 제132호)

강화내성은 강화산성으로 불리며 강화읍 관청리와 신문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내성은 현재 강화군청을 비롯하여 강화경찰서·강화우체국·고려궁지·강화향교 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말하는데, ‘강화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의 강화내성은 동서남북문과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남장대·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서문[瞻華樓]·남문[晏波樓]·북문[鎭松樓]동문[望漢樓]이 복원되었다. 4개의 암문 중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소남문 뿐이다. 수문은 상수문만이 복원되어 강화석수문으로 불리고 있다. 유적으로는 연무당·고려궁지·행궁·강화유수부 동헌·이방청·용흥궁 등이 있으며, 남장대·북장대는 터만 확인되고 있다.

내성의 둘레는 7122m, 높이는 3m 내외이고 너비는 4m 내외이며, 성가퀴의 높이는 1m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 축조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아무런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하는 1232년을 전후하여 동시에 축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강화의 성곽은 1259년에 몽골의 요구에 의해서 모두 헐리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은 축성과 훼성의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으나 몽골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였다. 이것은 몽골이 고려의 저항 근거지를 없앤 것이다.

효종 이후 강화내성 축조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기는 했지만, 이것을 시행한 것은 숙종 때였다. 이전에는 역사의 어려움을 들어 내성의 크기를 축소하고자 하였으나, 1710년(숙종 36)에 이르러서 현재 규모와 같이 남산을 포함하는 대규모의 산성을 계획하고 시행하였다. 부치 내성에 석성으로서 송악 이남 화산(花山, 지금의 남산) 이북에 의거하여 둘레 15리 343보 치첩수 1813의 규모로 완성한 것은 기존의 1658보의 구성(舊城)을 확장해서 축조한 것이다.

원래의 고려궁지는 현재 고려궁지 진입로 중간에 위치한 ‘김상용순절비각’에서 동서로 축조되어 내성의 한 지점에 연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동쪽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성공회 강화성당을 지나 강화중학교 후면 내성과 연결되고, 서쪽은 현재의 강화읍사무소 뒤편을 지나 성광교회 능선을 따라 북문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을 성벽으로 삼아 고려궁지, 조선의 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Ο 정족산성(삼랑성)

정족산성은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하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130호이며 정족산성 사고와 전등사 등이 그 안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2300m이며, 주위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삼랑성의 시설물로는 동문·남문·남문루·서문·북문이 남아 있으며, 1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유적으로는 전등사·정족산 사고·군창·군기고 등이 있었다.

산성은 정족산을 포함하여 5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이 산성에서 가장 높은 성벽이 위치한 곳은 정족산 정상부로 해발 222m이고, 가장 낮은 곳은 남문 지점으로 해발 75m이다. 따라서 그 차이는 147m에 달한다. 이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대문과 4개의 치가 있다. 4개의 치는 가파르고 시계가 양호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산성을 쌓게 하였기 때문에 삼랑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삼랑성은 막돌을 맞추어 성벽을 쌓았고, 성벽 안을 막돌로 채워 견고하게 하였던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 산성을 쌓은 기법과 비슷하여 삼국시대에 쌓은 석성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강화도가 고구려의 강역으로 편입되기 전에는 400여 년간 백제의 강역으로 한강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백제초기 중요한 요새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볼 수도 있다. 조선중기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해 오다가 1660년(현종 1)에 삼랑성에 장사각(藏史閣)을 지어 실록을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인양요 때에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이 산성에서 격퇴하였다.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각이 있다.

병인양요로 프랑스의 로즈제독은 군함 7척, 함재대포 10문, 병력 1000명 등을 인솔하여 강화를 공격, 점령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프랑스의 침공을 물리치고자 대장 이경하, 중군 이용희, 천총 양헌수를 임명하고 출정시켰다. 양헌수는 조선군이 병력과 화력면에서 월등하게 우세한 프랑스군을 정면으로 공격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기병작전으로써 그들을 격퇴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강화해협을 심야에 도하, 정족산성으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로즈제독은 나중에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올리비에 대령을 파견해서 정족산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탈환하게 하였다. 조선군은 정족산성의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강력하게 대응하여 일대 격전을 치룬 결과 마침내 승리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의 사상자는 5명뿐이었으나 프랑스군은 6∼7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족산성에서의 승첩은 몇 가지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조선군이 병력과 화력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을 역전시켜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격퇴시켰고,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의 패전을 계기로 철수했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패퇴시켰다는 것이다.


Ο 고려산성

고려산성이 있는 고려산은 강화 6대 산의 하나이며, 고려시대 이후 읍치의 진산으로 성은 동북쪽 일원에 위치해 있다. 둘레가 1190m이고, 토석혼축과 석축이 혼합된 토석성이며, 형태는 정상부와 조그마한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축성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고려시대라고 전해지고 있다.

산성의 구조는 토축으로서 둘레가 1만 9,372척이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또 토축성으로서 3정 48칸 4척(414.6m) 둘레라는 설, 1만 9,372척이라는 구설(舊說)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구설이 옳은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 산성이 토축이며, 높이가 5척(1.5m), 폭이 2칸(3.6m), 둘레가 864칸 (1,355.2m)이라는 기록도 나타난다. 이 중에서 육군박물관 조사단의 실측결과인 1190m와 가장 유사한 것은 후자일 것이다.

이러한 기록상의 이설을 종합하여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려산성뿐만 아니라 강화 소재 토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조사연구가 이루어져 고려산성의 규모, 나아가 강화 소재 토성의 현황과 규모 등이 더욱 확실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Ο 별립산성

별립산은 강화 북단에서 제일 높은 바위산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가파르고 초절하며 옛날에는 봉천산, 별악봉과 함께 바닷물로 둘러 싸여 있는 강화도와는 별개의 섬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종 문헌에 기록된 바 없는 토성터와 산성터가 연구자의 현지조사 결과 밝혀졌다.


Ο 하음산성

하음산성은 하점면 신봉리 산6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의 조망이 아주 좋다. 동쪽으로는 유도와 연미정이, 서쪽으로는 별립산과 교동이, 남쪽으로는 고려산이, 북쪽으로는 구등곶돈대와 예성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은 정상과 봉천대를 둘러싸고 있는 290m 규모의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의 동·서·북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면은 비교적 완만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등산로이다.

산성 내부에는 봉천대가 위치하는데, 이것은 현재 하음산봉수로 알려져 있다. 봉수는 서쪽으로는 교동의 화개산 봉수와, 동쪽으로는 남산봉수(또는 송악산봉수)와 응하고 있다. 봉수는 조선시대 제5거에 속하는 직봉체계 중의 하나였다.

산성은 고구려시대에는 중요한 관방시설로서 역할을 수행하다가 고려시대 이후에는 그 중요성이 낮아져서 폐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성은 해양전략적 가치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그것은 관측과 초계장소로서의 유리한 조건, 주변에 포진한 보조 방어체계와의 유기적인 작전 수행 가능성, 구체적인 방어전술의 유리함 등으로 살펴볼 때 고구려와 백제에게 모두 중요했던 관미성이었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문헌기록이 매우 적은 하음산성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작업이라든가 전략적 가치의 기준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연구결과가 있어야 될 것으로 사료된다.


Ο 정창성

정창성은 정포보를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며, 내가면 외포리 62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지는 현재 신축하여 운영되고 있는 외포리 항구 맞은편 산을 감싸고 있다. 이 성은 성안에 마을을 감싸고 축조한 성으로서, 그 둘레는 추정거리까지 포함해서 약 1090m이다. 현재는 동벽과 북벽의 토성만이 현존해 있으며, 서벽은 민가가 들어서면서 훼손된 듯하고, 남벽은 도로건설로 인하여 멸실된 듯하다.

이 성은 옹성(甕城)이 있으며, 진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성 내부에 위치한 정포영은 강화부의 서쪽 20∼25리에 있으며, 매음제도를 통하여 외적이 바다를 따라 몰래 숨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진보였다. 만호를 두었다가 별장으로 강등하였으며, 1669년(현종 10)에 다시 만호로 올렸고, 1678년에 별장으로 내리는 변천을 거쳐왔다.

내부에 창고가 있어 ‘정창성’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문화유적총람≫ 상에는 “내가면 정포, 지금의 외포리에 있었으며 1752년 조관빈(趙觀彬)이 창고를 헐어, 그 제목으로 진휼고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미루어 살펴볼 때, 정창성은 정포영을 방어하는 역할과 동시에 진휼고를 방비하고자 축조되었던 시설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Ο 강화전성

이 성은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마련한 위에 전돌로서 쌓아올려 만든 전축성이다. 축성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때(1213-1259) 당초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강화외성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영조때 유수 김시혁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다음해에 걸쳐 전돌로 개축했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이 성의 길이는 약 270m이다


Ο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교동면 읍내리 57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향토유적 제30호이다. 북쪽으로는 화개산이, 남서쪽으로는 남산봉수가 보인다. 교동읍성은 그 둘레가 779m이다.

1753년(영조 29)에 통어사 백동원이 치첩(雉堞)을 수축하였고, 1764년에 방어사 백낙윤(白樂倫)이 남문(庾亮樓)을 중건하였으나 동문(統三樓)과 북문(拱北樓)은 수축하지 못하였으며, 남문 앞의 해자도 역시 메워 버렸다. 규모는 둘레가 4정 26칸 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 동, 서, 북문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남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수영터를 확인할 수 있다.


Ο 갑창성

갑창성은 강화읍 갑곶리 1019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현재 강화역사관을 에워싸고 있는 산에 쌓은 성으로 둘레는 908m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제물진을 방어하기 위한 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갑창성은 석축이고 제물진 아래에 위치하였으며, 1684년(숙종 10)에 강화유수 윤해(尹易)가 처음 쌓았다. 1765년(영조 41)에 강화유수 김상익(金尙翼)이 비변사에 보고해서 그 석재로써 외성 600보를 보축하였다. 창성의 옛터는 흙 담장을 쌓고 잡목을 심어 울창하게 숲을 이루었다.

이 내용을 추정하건대 갑창성은 숙종연간에 쌓았다가 영조연간에 헐어서 외성을 보축했으며, 이후 토성만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갑창성은 제물진의 방어를 위한 성이었던 듯하다.


Ο 혈구진성

혈구진성은 불은면 삼성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 혈구산 정상을 포함하여 5개의 산봉우리를 감싸고 내려와 마을의 동서방향으로 남하하는 9km 정도의 대규모 평산성이다. 이 산성의 한 지점인 야촌 봉우리에서 화도돈대 하단까지 약 5km의 익성이 연결된다. 본성과 익성을 합치면 성곽의 길이는 14km에 달한다.

혈구진성은 냉정리 고개―외포리 방향의 2번 도로가 나 있는 안양대학교와 삼성초등학교를 포함하며, 이곳은 혈구진성의 동문터에 해당한다. 동문터에서 1.5km 정도 외포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농업기술센터가 불은면과 양도면 접경지역에 나타나는데 바로 이곳이 서문터이다. 혈구진성은 동문터와 서문터를 횡단하는 도로를 중심으로 북쪽은 산성이고, 남쪽 평야지대는 평지성에 해당하는 평산성이다.

신라는 변방 국경지대에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진을 건설하였다. 658년(무열왕 5)에 말갈의 방어를 위해 삼척에 북진을 건설한 것을 시초로 해서 신라 말에 집중적으로 변방지대에 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신라 말에 서북지역으로의 개척에 따른 진출로 평산에 패강진을 782년(선덕왕 3)에 설치하였다. 신라가 서해안 및 남해안의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진이 바로 청해진·당성진·혈구진이었다.

궁예는 송악으로 정한 이후에도 왕건을 통해서 인근지역에 대한 정벌을 수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궁예군은 신라의 중추적인 군진이었던 혈구성 즉 혈구진을 공격해서 철저하게 파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혈구진은 군진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900년에는 당성진도 혈구진과 동일한 운명에 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3대 수영이었던 청해진은 24년간, 혈구진은 54년간, 당성진은 72년간에 걸친 군진에 불과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1세기도 유지하지 못한 채 동방 해상제국 건설에 대한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는 혈구진성은 초기 고구려시대에는 혈구군의 읍치에 해당하는 지역, 즉 혈구산과 남쪽 평야지대를 아우르는 지역에 설치되었던 성곽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신라시대 후기에 해상방어의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되어 혈구진이 설치되면서 군사적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고 보인다. 이 지역이 강화의 행정·군사의 중심지가 된 것은 강화에서 차지하는 혈구산의 지리적 위치와도 유관하다.

혈구산 일대는 과거에 서쪽으로는 현재의 인산저수지 부근까지 즉 혈구진성의 서문 부근까지 해수가 들어오고, 동쪽으로도 대청포를 통해 현재 동문 부근의 돌성마을까지 역시 해수가 드나들었다. 이렇게 볼 때 동서로 해상접근이 가능하였다는 지리적 이점이 혈구산 일대를 강화의 중심지역으로 발달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거의 윤곽도 추정해 볼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되어 버린 돌성은 혈구군치가 혈구진으로 바뀌면서 군사적 기능이 강화되자, 대청포로 출입하는 인원·물자에 대한 통제와 아울러 군사적 위협을 차단하기 위하여 혈구진 본성의 보조성 즉 자성(子城)으로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혈구진이 궁예군에 의하여 초토화된 신라말 이후 혈구진의 행정·군사적 기능이 점차 상실되었고, 특히 고려말 고려 조정이 현재의 강화읍 쪽으로 천도하면서 역사적 역할은 더욱 유명무실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혈구진성의 동문 안 돌성 저수지 부근이 습진평(習陣坪)으로 알려져 있고, 동문 밖이 마장터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혈구진성 일대가 고려후기 이후 조선시대까지 신라시대만큼 군사적 중요성을 회복하지 못하였지만 군사훈련이나 군마사육장 등 보조적인 군사적 기능을 계속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Ο 교동 고읍성

교동 고읍성은 교동면 고구리 301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읍성은 본도의 창후리에서 배를 타고 교동 월선포항에서 내려 읍내리로 가다가 대룡리의 교동면 사무소를 지나 고구리로 가면 된다. 남쪽으로 화개산성이 있다. 교동 고읍성은 둘레가 1171m로서 극히 일부분만 석축이 남아 있고, 토성만 잔

교동 고읍형옥터

존하거나 논 또는 민가로 인하여 멸실된 상태이다. 이 성은 동·서·남·북문지를 추정할 수 있는 장소가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4문이 구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에는 타원형 연못과 장방형 관아터가 발견되고 있으며, 성 외부에서는 원형 감옥터가 발견되었다.

본래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으나 후에 교동이 되었다. 문헌 자료가 없어서 그 실체를 밝히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이후 폐성되어 그 가치를 상실했던 듯하다.


Ο 화개산성

화개산성은 교동면 고구리 산14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화개산은 산세가 우뚝 솟아 마치 뚜껑을 활짝 벌려 놓은 것과 같다 하여 화개라는 명칭이 붙었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서 사방이 완전히 조망되는 관측상 매우 유리한 고지이다. 이 산성은 전체 둘레가 2168m에 이르는 규모가 큰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성은 그 둘레가 1013m로서 화개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데, 이곳은 절벽을 자연 성채로 활용하고 있으며, 내성의 일부를 북쪽으로 길게 빼어 긴 용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특징이다. 외성은 전체 둘레가 1155m 정도이며, 외성의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잡석만이 성벽 선을 따라 흩어져 있다.

외성의 성벽이 이처럼 많이 붕괴된 것은 1591년(선조 24)에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또 교동이 수군의 중심지로서 부각되었던 까닭에 육상의 산성은 그 규모에 비하여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37년에 산성을 개축하여 통어영의 신지(信地)로 삼았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화개산성은 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하여 사전에 준비된 병력 집결지였으며, 해상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하였을 경우를 대비한 육상 예비 진지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고 증개축에 관한 기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에 왜구의 침입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증축하고 성내에 군량고를 두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1737년에 다시 개축하고 군창을 두었다.

화개산성은 축성 재료와 규모의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문헌기록을 종합해 볼 때 꽤 규모가 큰 산성이었던 듯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석성으로서 둘레는 1565보이며 그 내부에 연못과 샘이 각각 1개소씩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리지들에서는 석축의 둘레가 3543척, 높이는 18척인 산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전국유적총람≫은 산성의 둘레를 2km로 표시하고 있어서 육군박물관의 실측 결과인 2168m와 가장 유사하다.

< 출처 :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