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석문화와 고인돌

충남 옥천의 막지리 막기1호 선돌

Ο 거석문화란?

거석문화(巨石文化)는 인간이 일정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로 구조물을 축조하여 숭배의 대상물이나 생활의 한 방편으로 이용한 문화를 말하며 거의 전세계적으로 분포한다. 일반적으로 세계의 거석문화는 선사시대의 기념물이나 거석무덤 등 큰 돌을 이용한 고인돌〔〕이나 선돌〔〕이 이에 해당되고, 작은 돌을 이용한 돌널무덤이나 돌무지무덤도 포함된다.

Ο 우리나라의 거석문화

옥펀 석탄리 선돌

우리나라에서는 선돌과 제주의 하루방 그리고 거석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고인돌을 꼽을 수 있다. 고인돌은 세계 어느 지역보다 밀집과 군집성을 이루고 있는 점 이외에 다양한 외형적 형태의 존재, 거대한 규모를 가진 탁자식과 기반식 고인돌의 축조, 다양한 무덤방의 형태, 부장품으로 간돌검의 부장 등 중요한 특징 및 우수성을 지니고 있다.

이중에서도 대규모의 기반식 고인돌과 간돌검의 부장은 세계 어느 지역 거석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큰 특징이며 세계적 위상이라 할 수 있다.

Ο 세계의 거석문화

스톤헨지(영국)

이집트의 피라미드,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 등과 함께 거석문화의 기념물인 ‘고인돌’은 기반식 고인돌에서 비롯된 순우리말로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했는데, ‘지석묘’(支石墓) 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대개석묘(大蓋石墓)’라고 하며, 영어로 ‘돌멘(Dolmen)’으로 불린다.

선돌

이러한 거석의 고인들을 만들려면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힘을합쳐야 해서 당시 여러 사람이 집단을이루어 살았다는 집단생활과 다양한 형식과 크기로 권력자였던 무덤의 주인이 저마다 다른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무덤의 기능 이외에 집단의 권위나 힘의 상징물, 종교 또는 신앙행사의 제단으로써 사용되었던 것으로도 본다.

기원전 4천 년경부터 전 세계에 세워진 거석 기념물은 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받침돌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거나 괴어 놓은 모습이다. 스톤헨지가 있는 영국을 비롯하여 북유럽, 프랑스, 에스파냐 등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Ο 거석문화 고인돌

선사 인들이 남긴 삶의 흔적 ‘고인돌’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돌로 지탱하여 놓은 무덤이란 뜻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른다. 거대한 고인돌은 당시 정치체제, 사회구조와 건축술, 선사시대 동북아시아 문화의 이동·전파 과정과 한반도 고인돌의 변천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인돌 안에는 사람의 뼈 이외에도 토기와 석기 등 청동기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어 고인돌의 주인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큰 무덤을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비롯한 역사연구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중국 까이조루 고인돌

사람들은 고인돌의 놓인 위치 또는 생김새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특별한 이름을 붙여왔다. 고인돌을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다고 하여 독배기, 독바우로, 받침돌이 고이고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의 경우 괸바우, 닭바우로, 덮개돌의 형상에 따라 배바우, 두꺼비바우, 논둑에 있으면 논둑 고인돌, 솔밭에 있다 하여 솔밭 고인돌, 고양이처럼 생긴 괴바우 등이 그 예이다.

특히 강화 고려산 부근과 정상에 있는 고인돌은 옛날 아주 먼 옛날 중국의 천황이 특별한 이유 없이 이따금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는데 영하다는 한 스님이 말하기를 “고구려에 있는 오련산 정상 연못에 큰 잉어가 살고 있는데 그놈이 중국 쪽을 향하여 꼬리를 치면 천황의 병세가 악화하는 것입니다” 천황은 바로 강화도에 살고 있는 ‘마고 할멈’에게 “당장 큰 돌을 가져다가 오련산의 기운을 눌러 정기를 끊으시오” 하였다. 마고 할멈은 돌을 치마폭에 싸서 열심히 고려산 정상으로 옮기던 중 날이 밝아오자 그만 그 자리에 돌을 내려놓아 강화 부근리 지석묘가 되었고 정상으로 운반한 돌멩이는 고천리 고인돌이 됐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당시 오련산은 고려가 천도하면서 ‘고려산’으로 고쳐 부른 우리나라 유일의 나라 이름을 가진 국산(國山)이다.

Ο 고인돌의 형식

일반적으로 고인돌의 형식은 지상에 드러난 모습으로 분류하고 그 다음 무덤방의 구조로 나눈다. 탁자식 고인돌과 바둑판식 고인돌, 개석식 고인돌 등 크게 3가지 형식으로 구분한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탁자식 고인돌은 주로 한강 이북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고 하여 북방식 고인돌로, 판식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을 남방식 고인돌로 분류하였으나 고인돌의 연구조사가 확대되면서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방에서도 남방식이,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도 북방식 고인돌이 다수 알려지면서 ‘북방식 고인돌’ ‘남방
식 고인돌’이라는 지역표시 명칭이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 탁자식 고인돌(북방식) 판석으로 지상에 무덤방을 만들고 덮개돌을 덮는 형식으로 탁자처럼 생겼다 하여 탁자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주로 한강 이북부터 중국 요령지방까지 분포하기 때문에 북방식 고인돌이라고도 불리며 사적 제137호인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탁자식 고인돌의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인돌이다.
  • 바둑판식 고인돌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덮개돌과 무덤방 사이에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있는 것으로 바둑판처럼 생겼다 하여 바둑판식고인돌 또는 기반식 고인돌로도 불린다.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등 한강 이남에 분포되어 있어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강화군에는 바둑판식 고인돌이 1기도 없다.

 

 

  • 개석식 고인돌(무지석식)
    지하 석실과 덮개돌 사이에 받침돌 없이 덮개돌만으로 무덤방을 덮고 있는 형식으로 개석식 고인돌 또는 지석이 없다  하여 무지석식 고인돌, 놓인형 고인돌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개석식 고인돌은 한강 이북에서도 발견되는 등 우리나라 전지역에 분포해 있다.

 

 

  • 위석식 고인돌
    6장~12장 정도의 고임돌 자체가 무덤방이 되도록 한 것으로 안동, 부안, 제주도 등 주로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다.

 

 

  • 지상 석곽식 고인돌(고창식 고인돌)
    땅 위로 석관이 드러나 있는 고인돌로 고창에서만 볼 수 있는 이른바 고창식 고인돌이다. 여러 장의 판석을 이용해 만든 무덤방은 반지하 형태로 나타나고, 판석보다는 두툼한 상석을 가지고 있다. 이 고인돌은 북방식 고인돌 부류에 속하면서 남방식에서 나타나는 고임돌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Ο 강화 고인돌군의 입지적 특징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지금까지 강화에서 확인된 고인돌은 크게 양사면 교산리, 하점면 부근리(송해면 상도리·하도리 포함), 삼거리, 내가면 고천리, 오상리 등 5개의 지역에서 군락을 이루어 밀집 분포되고 송해면 양오리, 하점면 이강리·창후리·신봉리, 강화읍 대산리, 양도면 도장리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들 강화 고인돌은 분포 입지를 기준으로 구분하면 크게 평지 형과 산상형으로 나눌 수 있다. 산상 형 고인돌의 입지는 그 주변 지역이 넓게 조망되는 곳으로 입지선정에서 평지형 고인돌과는 다른 기획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

또한, 강화 고인돌은 분포 위치와 상태에 따라 규모의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대부분은 등고선의 방향과 수직으로 축조되었으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강화 부근리 지석묘에서 알 수 있듯이 평지에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인돌의 규모가 다른 지역의 것들에 비교해 월등하게 크다는 점이다.

이는 단독형 고인돌이 군집 형과 구별되는 사회적 의미가 있을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상당히 높은 산상에서 확인되어 주목받은 고천리고인돌 군은 다른 지역보다 두드러지게 규모가 작다. 이는 고인돌 축조 시 석재의 운반과 관련된 측면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지만, 고인돌 축조 당시 강화 해안선을 가상해 보면 고인돌 군이 바다와 직접 접해 있음을 볼 수 있다.

< 강화도 간척전후의 지형도 >

Ο 강화 고인돌의 발견

1916년 조선총독부, 「강화 하도리 고인돌 조사」
1961년 「경기도 선사시대 유적 명표」
1963년 채병서·김재원,「강화 하도리 황촌 고인돌 발굴조사」
1964년 김원룡, 「한국사전유적유물지명표」
1966년 국립 중앙박물관, 「강화 삼거리 고인돌 발굴조사」

100년 전인 1916년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금서용(今西龍)에 의하여 송해면 하도리 아랫말 고인돌 군 5기를 처음 조사했으며 그 내용은 다음 해 발간한 『대정 오년도 고적 조사보고』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강화 고인돌에 조사가 미루어지다가 1961년 『경기도 선사시대 유적 명표』에 하점면 부근리, 송해면 하도리 황촌마을 고인돌이 조사되면서 본격 시작됐다.

강화 고인돌에 대한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현장조사를 한 것은 1992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형구 교수)의 조사와 2012년 (사)인천 문화재보존사업단의 문화재 돌봄 사업의 목적으로 일제 조사한 결과 160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하도리 아랫말 고인돌군

Ο 강화 고인돌의 특징

강화는 산과 물이 풍부한 곳으로 고인돌을 만들 수 있는 지배집단이 일찍이 생겨났다. 또 고인돌을 만들 좋은 편마암이 풍부하여 주변 산을 중심으로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의 분포지도를 보면 현재는 고인돌이 바닷가에서 떨어져 있지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인 청동기시대에는 바다와 가까운 해안지역과 연관이 있어 어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화 고인돌의 특징은 대략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고려산. 별립산, 봉천산 등 산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특히 고려산 일대를 중심적으로 90기 이상이 분포하고 가장 북측의 별립산과 봉천산 일대에 32기가 분포하는 등 강화도의 북측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둘째, 여러 개의 고인돌이 한 곳에 무리를 이루고 있다. 160여 기중 한 유적에 평균 14기 가까운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분포하고 분포지는 10여 곳이 확인된다.

셋째, 산의 경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평지인 곳이 당시에는 바닷가나 갯벌로 되어 있던 지역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넷째, 탁자식 고인돌 비중이 가장 높다. 탁자식 고인돌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북한 지역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섯째, 성혈이 만들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가 적다는 점이다. 총 160여 기의 고인돌 중 성혈이 만들어진 고인돌은 4기에 지나지 않는다. 성혈은 대개석식 고인돌에서 발견되는데 강화는 대다수가 탁자식 고인돌이기 때문에 그 수가 적을 것으로 추정한다.

Ο 고인돌의 크기와 형식·위치

고천리고인돌3군

고인돌의 크기와 설치 장소를 보면 당시 부족 구성원의  전체 수를 파악할 수 있다. 강화 고인돌 129기의 덮개돌 길이를 측정한 결과 4m 이상의 대형고인돌은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 부근리 지석묘를 포함하여 총 6기뿐이다. 대형 고인돌은 주로 낮은 구릉 위나 능선 끝에 위치한다. 이는 평지보다는 조금 높은 곳에 고인돌이 만들어져야 더 규모가 크고 웅장해 보이며 위엄이 있어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사시대의 마을은 강 가까운 곳의 언덕 위에 주로 자리를 잡는다. 먹고 마시고 농사짓는 데 꼭 필요한 물 가까이에 살면서도 적의 침입을 한눈에 감시하고 내려다보려면 강가의 언덕 위가 가장 적합하기 때문으로 고인돌 역시 마을을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Ο 강화 고인돌의 출토유물

선사인 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와 죽은 후의 세계를 위하여 살아있을 때의 권위에 합당하는 부장품
을 고인돌에 넣었다. 오늘날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고인돌이 축조되던 시기와 생활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1966년에 발굴된 하점면 삼거리 소동부락에서는 고인돌 주변에서 빗살무늬토기 파편이 상당 출토된 바 있으며, 고인돌 안에서는 무문토기 파편을 비롯하여 간돌화살촉·돌칼·방추차·바퀴날도끼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2000년 발굴된 내가면 오상리 고인돌 군에서는 표토 층에서 석영재질의 주먹도끼가 출토되었고, 고인돌 주변의 적석부분과 퇴적토 안에서 빗살무늬토기 파편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2기 고인돌 안에서는 대롱옥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고인돌의 묘실 밖 주위에서 간돌칼·돌촉·반월형돌칼·어깨도끼·바퀴날도끼·돌칼 등이 출토되었다.

강화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 / 소장 : 강화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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