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 택지

Ο 이건창 생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조선 후기의 문신 영재 이건창(1852∼1898) 선생이 살았던 생가이다.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종 11년(1874) 서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충청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강직한 성격 탓에 세 번씩이나 유배되고 또 풀려났다.

그의 저서 『당의통략』은 파당을 초월하고 친족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평가 받고 있다. 저서로는 『당의통략』외에 『명미당집』이 있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 년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바로 옆에는 이광명(李匡明), 이시원(李是遠) 등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Ο 철종외가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Ο 송암 박두성 생가터

한글 점자 훈맹정음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터(址) 이다.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는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의 유년기를 보내던 곳이다. 1913년 제생원 맹아부(현 국립 서울맹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시각 장애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선어 점자연구회를 조직하여 훈맹정음을 창안 하였으며 1926년 11월 4일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을 반포 하였다.

인천광역시 영화학교교장(현 영화초등학교)에 취임하여 한글 점자 보급에 힘썼으며, 조선맹아사업회를 조직 하였다. 1945년에는 시각장애인 회람지인 ‘촉불’을 발간 하였으며 1962년 국민포상 수상 및 서거 후 1992년 은관문화 훈장에 추서 되었다.


Ο 윤집택지

윤집택지는 강화읍 월곶리 615번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연미정 군부대 앞에서 황형사당 사이의 소로변에 있다. 택지비가 세워져 있는데 규모는 높이가 117cm, 폭이 50cm, 두께가 19cm로 비의 앞면에는 ‘충신고학사윤집택지(忠臣故學士尹集宅址)’라고 쓰여져 있다. 윤집은 병자호란 때 청과의 주전론을 주장하다가 1637년(인조 15) 청나라에 잡혀가서 지조를 지키다 피살되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 10만의 오랑캐가 압록강 얼음을 건너서 조선으로 쳐들어 온 것이다. 오랑캐는 12월 14일에는 장단을 통과하고 16일에는 국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피난해 간 남한산성까지 포위하였다. 10만 대군이 7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수도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의주부터 서울간의 주요 국도가 전면 무인지경으로 방치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조선은 마지막으로 성에서 군신이 47일간을 농성 항거하다가 한강변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앞에 투항하여 굴욕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조선은 이 전란에서 패배한 결과 명나라를 숭배하던 몇 배 이상으로 사대의 예를 청나라에 바치게 되었고, 세자와 대군까지 인질로 심양에 호송되는 동시에 척화론의 대표인물이라 하여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청으로 압송되는 등 갖은 곤욕을 당했다. 윤집의 위패는 홍익한과 함께 충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Ο 죽산 조봉암선생 생가터

조봉암은 1898년 강화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죽산 선생은 YMCA 중학부이던 1919년 인천에서 가장 큰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첫 옥살이를 했다.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면서 사회주의 노선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7년간 복역하는 등 치열한 항일 운동을 벌였다.

해방 후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 등을 지내고 진보당을 창당했지만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등으로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2심과 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재심 청구가 기각되면서 1959년 7월 형장의 이슬이 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죽산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했다.

대법원이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2년여의 심리를 한 끝에 2011년 1월 무죄 판결을 받아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자료 : 연합뉴스)


Ο 해군사관학교 사택

조선 말기의 해군 장교와 수병을 양성하던 해군사관학교.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의 교관이었던 영국의 콜웰대위가 생활했던 사택이다. 현재는 철거되어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Ο 홍익한택지(洪翼漢宅址)

인조때에 척화파로 윤집, 오달제와 더불어 삼학사의 한 사람인 홍익한이 살던 집터이다.


Ο 황사영 생가터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황사영의 생가터로 장무공 황형장군 묘역에 있다.


Ο 황형택지

황형택지는 강화읍 월곶리 242번지 연미정 입구 아래쪽에 가로 20m, 세로 17m 정도의 공터다. 1510년(중종 15) 삼포왜란 때의 명장이었던 황형이 살던 집터이다.

황형은 말년에 낙향하여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택지 위의 연미정은 그가 왕에게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주위에 월곶진·월곶돈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묘와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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