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면

고려 고종때 전국 2대 사찰의 하나인 선원사(禪源寺)가 이곳에 있었다하여 선원면(禪源面)으로 호칭하였고 조선 인조 이후부터 선원면(仙源面)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선원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 즉 이상향이란 좋은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월리(錦月里)

옛부터 거말동(巨末洞)이라 하였으며 거말동을 대촌(大村)이라 부르기도 하 는데 이 명칭은 큰말이란 뜻으로 속칭 금월어지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 다.

개골동능소(蓋骨洞陵所)터 : 대문고개 서남편 야산 개골동에 있는 고려 태조와 세조의 두 능침(陵寢)을 1243년(고종 30)에 이곳에 옮겼던 터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능묘는 1276년 승천부로 이장되었다.

기세미 : 금월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세갈래로 길이 나서 길삼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기새미라고 부르고 있으며 뒷산이 갈지산(葛芝山)으로 갈지산의 지자와 동녘, 양지, 가운데 마을의 삼(三)자를 따서 지삼촌으로도 부른다.

대문이 : 금월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고종이 천도후 이 고개위에 중성의 남문인 태안문(泰安門)이란 큰문을 세웠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대문촌이라고도 한다.

대촌(大村) : 금월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큰말이라 불렀으며 큰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영골(永谷) : 옛부터 골짜기가 긴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영골이라 칭하였으며 대영촌이라고도 한다.

연리(烟里)

예전에 이마을 북동편에 와야촌(瓦冶村)이 있어 기와를 구워 마을에 항상 연기가 자욱하여 연동(烟洞)이라고 하였으며 일설에는 이 마을에 연꽃이 많이 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에 물이 풍부해 때때로 수증기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연동으로 칭한다고도 한다.

고잔(串內) : 능골 동편에 있는 골짜기로 산줄기가 바다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곶의 안에 있는 골이라 고잔이라 한다.

능곡촌(陵谷村) : 고려 고종의 가릉(假陵)이 있던 마을이라 능곡촌이라 부른다.

연화촌(蓮花村) : 예전에 연리와 금월리의 접경에 연꽃이 많이 피는 연못이 있어 연화촌이라 칭한다.

용진촌(龍津村) : 1656년(효종 7)에 설치한 용진진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지산리(智山里)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래의 신지동(神智洞)과 남산동(南山洞)을 합하고 신지에서 지(智)자와 남산에서 산(山)자를 따서 지산리라 칭하였다.

남산촌(南山村) : 옛날 신지촌 남쪽 산자락에 남산대가 있던 마을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독제이 : 예전에 이곳에서 도기를 만들었다고 하여 독점마을이라 부르다가 독제이로 변하였으며 일설에는 왜말 동쪽에 독점이 있는 마을로 인조때 이곳에 도촌(陶村) 정유성이 살았다고하며 그가 문과에 올라 우의정에 이르러 현달하자 뒷산이름을 독정산이라 부르고 그아래 마을를 독정촌이라 한 이후부터 독제이로 부른다고도 한다.

신지촌(神智村) : 지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에 이곳 마을 뒷산 사찰에 신지라는 고승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을 따라 신지촌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와야촌(瓦冶村) : 신지촌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영조때 강화 동쪽 해변에 장성을 개축할 때 그곳에 필요한 벽돌을 굽던곳이라 와야촌이라 하였으며 속칭 왜말로 부르고 있다.

신정리(神井里)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신당동(神堂洞)에 이정동(梨井洞) 일부와 옛 장령면 갑곶동(甲串洞) 일부를 합하고 신당동에서 신(神)자와 이정동에서 정(井)자를 따서 신정리라 하였다.

가자촌 : 도감 동북쪽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가재가 많아 가재골이라 하다가 변하여 가자골로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더리미(加里尾) : 옛날에 이마을 뒤 언덕에 가리정이란 정자가 있어 더할가(加)자를 더로 풀어서 더리미라고 부른다.

도감(都監) : 더리미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훈련도감이 있던 곳으로 도감이라 한다.

신당촌(神堂村) : 더리미 위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뒤에 신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신데이라고도 부른다.

유정촌(柳井村) : 문화 유씨가 많이 사는 마을로 물이 좋고 수량이 풍부한 운수물이란 우물이 있어 유정촌이라 부른다.

창리(倉里)

이곳은 고려 고종때에 관창지대로 성을 쌓고 방호하던 현당산 창성이 있어 창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창동에 이정동(梨井洞)과 냉정동(冷井洞) 각 일부를 합하고 창리라 부르고 있다.

고식이 : 창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앞 큰 내가 수심이 깊어 다리를 높게 놓아 고수교(高水橋)라 하였는데 후에 변하여 고시기라 부른다고 하며 이정동의 별칭이다.

당후촌(堂後村) : 마을 뒷산너머에 신당이 있어 신당뒤에 있는 마을이라 당후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정촌(梨井村) : 이 마을 가운데 공동우물이 있는데 우물 주변에 배나무가 있어 배나무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이정촌으로 부른다.

선행리(仙杏里)

산수의 경치가 아름답고 살구꽃이 많이 피는 고장이라하여 신선선(仙)자와 살구행(杏)자를 따서 선행동으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선행동과 증산동(甑山洞)을 합하여 선행리라 하였다.

노적봉(露積峯) : 선행리 중앙에 있는 산으로 김포쪽에서 보면 그 형상이 마치 노적가리 같아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고려는 위협이 증대하자 고려군은 산 모양을 이용해서 산 전체에 이영을 둘러 군량미를 대량 확보한 것처럼 위장하고 혈구산에서 흐르는 물에 회가루를 풀어 쌀을 씻어서 쌀뜨물이 흐르는 것처럼 위장해 몽골군이 이를보고 위세에 눌려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술감 : 산수가 아름답고 살구꽃이 많이 피는 마을로 양지쪽을 선행촌, 음지쪽을 선화촌이라고 부르며 두 마을을 합하여 술감이라고 하는데 술감은 수암(壽岩)이란 고유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증산촌(甑山村) : 마을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있어 지형이 시루밑같이 생겼다하여 증산촌이라 칭하며 속칭 시리미라고 부른다.

충렬사(忠列祠) :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때 순절한 충신 선원 김상용의 집터로 전하는 곳에 1641년 사당을 지어 현충사라 하였다가 1658년 효종께서 충렬사로 사액한데서 유래되었으며 현재 병자호란때 충신 김상용외 26위, 신미양요때 충신 어재연외 1위 등 합29위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다.

냉정리(冷井里)

이곳에 찬우물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차고 맛이 있어 명정(名井)으로 일컬어 왔으며 또한 이 마을에 수질이 비슷한 옥골물이라는 이름난 우물이 또 있어 찬물이 나는 마을로 상징화되어 냉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냉정동의 일부를 창리로 넘기고 대문동의 일부를 합하여 냉정리라 하였다. 현재 찬우물은 1914년 창리 관할로 변경되었다.

고산촌(高山村) : 옛 금월동과 냉정동 사이에 있는 지대가 높은 지역에 있는 마을이라 고산촌이라 하였으며 속칭 고새이라고 한다.

교동촌(校洞村) : 1923년 선원보통학교가 이곳에 세워진 이후 교동촌으로 부르고 있다.

대청뚝(大靑堰) : 1663년(현종 4) 강화유수 조복양이 축조하였으며 선원면과 불은면 사이를 흐르는 삼동암천이 포구였을 때 이곳을 통하여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였다고 하여 제방 명칭을 대청뚝이라 부른다고 전하고 있다.

물우리 : 고새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 마을 앞에 보(洑)를 막아 물이 풍부해 농사에 걱정이 없어 물우리라 하였다고 하며 자연마을 명칭은 물오리란 뜻의 수부촌(水鳧村)으로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물우리를 한자로 표기할 때 물오리로 알고 수부촌으로 명명한 듯 하다.

울내기 : 찬우물고개 아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 마을에 부자가 살았는데 도둑이 많아 울타리를 네길이나 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울네기가 변하여 울내기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