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塚)과 고분(古墳)

왕가의 무덤 능(陵), 묘(墓), 총(塚), 고분(古墳)의 분류

: 능묘의 준말로 왕이나 왕비의 무덤, 사후에 왕으로 추증되면 원(園)에서 능으로 승격
:  그 외에 빈, 왕자, 옹주, 공주, 후궁, 귀인 들뿐 아니라 일반인의 무덤
: 무덤의 주인은 알 수 없으나 다른 무덤과 특별하게 구분될 수 있는 특징이 있는것
고분 : 무덤 주인도 모르고 다른 무덤과 구별되는 큰 특징도 없는 오래된 무덤
: 왕세자, 왕세자비, 왕세손과 그 비, 왕의 생모인 빈과 왕의 친분있는 인물


Ο 신미순의 총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로즈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되기를 거부하여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순국하였다. 이때 어재연 장군과 휘하 전 수비군은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였는데,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20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광성보에 있다.


Ο 능내리 석실분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8호

강화 능내리 석실분은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이다. 무덤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되었으며,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자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편·구슬류, 상부원보(祥符元寶) 1점, 은제못, 금박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처리하여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하였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Ο 인산리 석실분

인천시 기념물 제27호

고려시대의 석실분으로, 혈구산 서쪽 퇴모산 남쪽 8부 능선에 있다. 이 무덤은 구릉의 경사진 면에 반지하식으로 축조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돌과 깬 돌을 이용하여 직사각형의 네모상자 형태로 돌방(석실)을 만들고 그 앞에는 경사면을 따라 3단의 축대를 쌓아 묘역을 구성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는 축대가 모두 붕괴되어 묘역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석실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돌무지가 형성되어 이곳이 인산리 석실분의 묘역이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천장은 크고 납작한 판돌을 덮은 납작천장(평천장)이고, 동·서·북쪽의 벽면은 크기가 일정치 않은 자연석을 이용해 면을 맞추어 5∼7단 쌓아 올린 뒤 남벽은 크고 납작한 돌을 세워 입구를 막은 형태이다.


Ο 우릉고분

이 고분은 고려시대 고분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이 마을의 이름이 ‘우릉’ 이라는 마을 지명에 따라 혹시 ‘우’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Ο 긴우물 고분군

Ο 백제시대 횡구식석실묘

양도면 인산리 뒷산인 퇴모산(退帽山) 중턱에서 백제시대의 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 1기가 일제시대에 발견되었다.

 

Ο 김지곡 고분군

Ο 대묘동 고분

Ο 별림산 고분

Ο 석릉 고분

Ο 수월하 고분

Ο 하도리 고분군

Ο 퇴모산 고분

 

 

 

 

 

< 출처 :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