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유적 (22개)

Ο 제1호 윤집택지

  • 지정번호 : 1호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615-1

윤집선생 (1606-1637)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설서, 이조정랑, 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과의 화의를 반대하여 중국 심양으로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척화의 소신을 주장하다 피살되었다. 세상에서는 오달재,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우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선생이 살던 집의 건물은 없어지고 밭으로 변했으며 대리석으로 된 비석만 전하고 있다. 비석 전면에는 충신고학사 윤집택지라 새겨져 있다.


Ο 제2호 강화중성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일대

이 성(성)은 고려 고종 37년 (1250)에 축조한토성이다. 이 중성의 총 길이는 약 6km이며 강화읍 옥림리 옥림고개로부터 시작하여 북산 정상에 이르렀고, 선원면 신정리로부터 창리, 대문고개를 거쳐 남산 정상에 이르렀다.

이 성문에는 7개의 성문을 설치하고 송도를 모방하여 이름을 지었다 한다. 정 동문은 선인문, 동남쪽은 장패문, 남쪽은 태안문, 서남쪽은 광덕문, 서쪽은 선기문, 서북쪽은 선의문, 북쪽은 북창문, 동북쪽은 창희문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Ο 제3호  황형택지

  • 지정번호 : 3호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1459 – 1520)의 옛집터이다. 선생의 자는 언평, 본관은 창원으로 성종 11년 (1480)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

이 후 혜산진 첨절제사, 훈련도정, 의주 목사, 회령 부사, 함경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시 전라좌도 방어사로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중종 7년(1512)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이며 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며 연미정을 하사하여 이곳 월곳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한다.

택지는 월곶진을 설치한 뒤 관아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논밭으로 변하였으며 후손들이 파손된 비석을 새로이 설치 하였다.


Ο 제5호 보만정지

  • 지정번호 : 5호
  •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282

강화읍 국화리 남산 서쪽 그윽한 위치에 있으며, 옛날 황련사라는 절터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 정자는 조선 고종 4년(1867)에 강화군 첨사를 역임한 윤상건이 팔각 건물로 축조하였으나 1983년 풍우에 건물은 무너지고 현재는 주초석과 당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샘이 남아있다.

인근에는 애련당과 배회루의 건물이 현존한다.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아늑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던 곳이다. 이 정자 입구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5단의 계단이 있고, 외곽으로 높이 63 – 65cm의 장초석 7개, 그 안쪽으로는 높이 110 – 116cm의 장초석 7개가 남아있다.


제6호 황형신도비(黃衡神道碑)

향토유적 제6호(2013. 8. 2 황형택지 (기념물 제65호)에 포함 삭제)

황형신도비는 전체높이가 232cm, 비신의 높이가 200cm, 폭이 82cm이며, 두께가 23cm이다. 비문은 그의 현손 윤방이 짓고, 윤제(尹祭)가 글을 썼으며, 김상용이 전을 했다.

황형은 자가 언편(彦平), 본관은 창원(昌原), 선공감정(繕工監正) 황예헌(黃禮軒)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대의를 통하였고, 활쏘기에도 능해 문무를 겸비했다. 1480년(성종 11)에 무과와 진현시(進賢試)에 급제하고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하였고, 1486년에 무과중시에 장원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올라 유원(柔遠)과 혜산진 첨절제사(僉節制使)에 특진하였다.

그후 황형은 함경북도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으며, 삼포왜란 때는 방어사로 활약했다.

그 후에도 변방의 오랑캐들의 난리를 진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공조판서에 제수되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는 풍체가 당당하고 엄연한 기상이 있어 명나라 사신 왕헌신(王憲臣)이 한번 보고 감탄하여 주머니 속에 있던 약물을 신표로 주어 이후에는 중국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Ο 제7호 철종외가 묘

  • 지정번호 : 7호
  • 소재지 : (23044) 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산70-46

철종외가 묘는 철종외가에서 좌측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에는 염성화(廉星華)·염덕석(廉德碩)·염상임(廉尙任)의 묘역이 있다. 철종 외가는 1859년(철종 10)에 강화유수 조충식(趙忠植)이 왕실의 위신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철종 외숙 3인의 묘역을 정화하고 비석을 세웠다. 이에 철종의 외가 5대의 벼슬을 추증하고, 냉정리에 전답 10여 정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우측에 성화의 묘역이 있고, 가운데 덕석, 좌측에 상임의 묘역이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중활개를 하였다. 묘역의 형태상을 보면 먼저 성화의 묘역을 조성한 뒷편 그 좌측의 빈 공간에 덕석과 상임의 묘역을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계체석이 일자의 형태를 하지 않고 ‘ㄱ’자나 ‘ㄴ’자 형태로 연이어 있다. 활개 역시 성화의 묘역에서 연이은 흔적이 보인다.

3기 모두 공통적으로 묘표 음기에 ‘용담‘이란 글씨가 움푹하게 파져서 새로 새겨 놓은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파평 염씨가 용담 염씨를 가칭하여 철종의 외가라고 속이기 위하여 글씨를 ‘파령’이라고 새긴 것을 새로 정비한 것이라고 한다.


Ο 제9호 경고비

  • 지정번호 : 9호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6

해문방수비는 불은면 덕성리 836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덕진진 경내에 1기가 있다. 이 비는 1867년에 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 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경고비(警告碑)라고도 부른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47cm, 폭이 54.5cm, 두께가 28cm의 단면비이다.

비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져 있는데 당시 쇄국정책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Ο 제10호 쌍충비각

  • 지정번호 : 10호
  • 소재지 : 강화군 불은면 덕진로 31

쌍충비는 불은면 덕성리 산12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성보 경내에 2기가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순절비인데 폭이 58cm, 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Ο 제11호 정족산 가궐지

  • 지정번호 : 11호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9번지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고종이 건립 했던 가궐터이다. 당시 백승현이 낭장으로 재임시 고종이 적당한 가궐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하고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변국의 대국들이 조공 할 것이라고 건의 하자, 왕은 대장군 조문주, 국자제주 김구, 장군 송송례에게 가궐을 짓도록 명하여 완성 하였다 한다.

당시 가궐의 건물은 몽고병이 침입해 왔을 때 소실 되었다 하며 당시에는 이 가궐에서 왕이 거쳐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의 생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Ο 제12호 선원보각지

  • 지정번호 : 12호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44번지

전등사의 산내암자인 극락암 뒤쪽으로 약 50m정도 올라가면 예전 전등사의 부속시설이었던 선원보각 및 장사각이 옛터에 복원되어 있다. 선원보각은 조선 왕실의 계보와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었으며, 장사각 역시 ≪조선왕조실록≫ 등 나라의 귀중한 사서를 보관하던 건물이었다.

≪전등본말사지≫에 의하면 본래 묘향산에 있던 선원보각과 장사각을 1660년(현종 1)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하는데, 이 때부터 전등사에서 줄곧 이 건물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순종 2) 소실될 위기도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절의 창환(昌煥)·영함(永咸) 두 스님에 의해 보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국가의 명으로 선원보각이 철폐되고 서적들은 한양으로 옮겨졌고 그 뒤로 건물들은 퇴락하였다. 계단석 일부와 축대석 정도만 남아 있었으나 199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Ο 제13호 고려이궁지

  • 지정번호 : 13호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404-1
  • 기타 : 사유지로 접근이 어렵고 관리도 할 수 없다

이 궁지는 옛 고려시대 사찰인 흥왕사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 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건립 되었다고 전한다. 이 궁은 왕이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으로서 역대 고려 왕조는 특히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많은 이궁을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은 멸실되고 페허화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현재는 축대 일부와 주초석이 남아있다.


Ο 제17호 홍익한 택지

  • 지정번호 : 17호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30-2

조선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시 주전론을 주장하던 삼학사 중 한사람인 홍익한(1586-1637)의 옛 집터이다. 선생의 자는 백승, 호는 화포, 운옹, 본관은 남양이며 진사 이성의 아들이다.

이정귀의 문인으로 인조 2년(1624) 정시 문과에 장원한 이후 사서, 장령이 되었으며 인조 14년(1636)청나라의 사신이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자 참사를 청했으며 병자호란시에는 주전론을 주장 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후 평양부 서윤을 지냈으나 오달재, 윤집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서 피살 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이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등이 전한다. 선생이 살던 택지에 세워져 있던 비는 1963년에 파손되어 자연석의 대석만이 남아있다.


Ο 제18호 분청사기요지

  • 지정번호 : 18호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114번길 28

화도면 사기리 대사부락 입구 도로변에서 약 30m 떨어진 야산 50㎡에 걸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의 분청사기 요지로서 가마는 발견할 수 없으나 굽다가 버린 도기의 파편이 주변에 산재되어 있다.

고려자기의 대부분이 12세기 전후의 것이며 또 그 제조 기술이 가장 발달했던 때가 강화 천도 당시 였음을 생각할 때 이 곳은 도요지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분청사기요지가 위치해 있는 사기리란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Ο 제19호 함허대사 탑

  • 지정번호 : 19호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258번길 142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함허대사가 정수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수도처 였던 뒷산 중턱에 현 부도를 봉안한 것이라 한다.

부도의 구성은 기단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그 기본형은 팔각 원당형을 따르면서 사각의 단순한 변형을 가미 하였다.

기단부는 상, 하대로 형성 되었으며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부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164cm이다.


Ο 제25호 봉가지

  • 지정번호 : 25호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420-2

하음 봉씨의 시조인 우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연못이다. 고려 예종 2년(1107) 봉천산 밑에 사는 한 노파가 연못가로 물을 길러 갔을 때 홀연히 하늘에 구름이 가득 끼고 우레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연못에 석함이 떠올라 이를 건져내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 있었다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자 왕은 궁중에서 양육하고 봉우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봉우는 성장하여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위위소랑, 정당문학, 좌복야로 공을 세워 하음 백에 봉해져 이때부터 그 후손들이 이곳에 살며 본관을 하음으로 하여 봉씨 세계를 잊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봉가지는 약 33㎡ 정도의 연못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이 연못가에 후손들이 세운 유적비가 있다. 이 연못은 흙으로 약 1m 정도의 뚝을 쌓고 시멘트로 곽을 짜 놓았으며 수면으로부터의 높이는 약 65cm 이다.


Ο 제26호 천곡고인돌

  • 지정번호 : 26호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신삼리 69

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부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선사문화유적의 하나이다. 그 형태는 탁자모양의 북방식으로 북방식 지석묘는 강화, 인천, 수원, 이천을 연결하는 선을 한계로 하여 그 북쪽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북방식은 흔히 4매의 지석으로 장방형의 지석을 만들고 그 위에 개석을 얹는 것이 보통인데 현재 이지석묘는 2매의 지석이 멸실되어 있다.

이 지석의 높이가 2.6m이며, 개석은 장축이 7.2m, 폭 5.5m, 두께 30 – 33cm의 거대한 규모이다. 현지인의 말로는 이렇게 큰 규모의 개석은 여기에서부터 1.5km떨어진 고려산이나 별립산에서 채취해야 한다고 한다. 이 지석묘는 부근에 산재한 다른 지석묘군과 일정하게 조응될 뿐 아니라 그 분포가 남방한계선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도 고고학적으로 그 중요성이 크게 인정된다.


Ο 제27회 석주권필유허비

  • 지정번호 : 27호
  • 소재지 :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892

석주 권필(1569 – 1612) 선생은 조선 중기의 탁월한 시인으로서 한때 강화에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며 시화를 나눈 인연을 갖고 있다. 선생의 자는 여장, 호는 석주, 본관은 안동, 벽의 아들이다.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 25년 (1592)임진왜란때는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고, 광해군 초 권신 이이첨이 교제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광해군의 비 유씨 척족들의 방종을 궁유시로 풍자했다고 하여 광해군 4년(1612)친국을 받은 뒤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친구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별세했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유고로는 「석주집」을 남겼다. 유허비는 대리석으로 그 전면에 「석주권생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Ο 제28호 연산군유배지

  • 지정번호 : 28호
  •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 독서의 부활 「국조보감」 「여지승람」의 간행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인 폐비 윤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계하는 이가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적거지는 봉소리 신골과 고구리 연산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조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11월 죽은 터입니다. 또한 인근에는 부근당이 있는데 이 곳에 연산군과 그 부인 신씨의 화상을 모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 아래에는 교동부사가 있던 동헌자리가 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위에 누각을 얹고 있었던 돌기둥 두 개가 남아있습니다. 이 동헌자리에 황해, 경기, 충청 통호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Ο 제29호 교동봉수대 제29호

  • 지정번호 : 제29호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233

화개산봉수는 교동면 대룡리 산23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수는 화개산 정상 서쪽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며, 향토유적 제29호이다.

남쪽 아래로는 교동읍성과 남산봉수가 한눈에 들어오며, 동남쪽 멀리로는 덕산봉수가, 동쪽으로는 하음산봉수가 조망된다. 화개산성 정상과는 270m 거리에 있다.

화개산봉수는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다시 본도의 하음산봉수로 연락을 보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봉수군은 46명이었다.

봉수는 김포 백석산, 통진 수안성산, 강화 진강산, 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강화 하음산, 강화 송악산, 통진 남산, 김포 북성산, 양천 화개산을 거쳐 서울 남산 제 5봉(烽)으로 연결된다.


Ο 제30호 고구리 산성지

  • 지정번호 : 30호
  •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145

고구리산성(화개산성)은 교동면 고구리 산14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화개산은 산세가 우뚝 솟아 마치 뚜껑을 활짝 벌려 놓은 것과 같다 하여 화개라는 명칭이 붙었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서 사방이 완전히 조망되는 관측상 매우 유리한 고지이다.

이 산성은 전체 둘레가 2168m에 이르는 규모가 큰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성은 그 둘레가 1013m로서 화개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데, 이곳은 절벽을 자연 성채로 활용하고 있으며, 내성의 일부를 북쪽으로 길게 빼어 긴 용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특징이다. 외성은 전체 둘레가 1155m 정도이며, 외성의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잡석만이 성벽 선을 따라 흩어져 있다.

외성의 성벽이 이처럼 많이 붕괴된 것은 1591년(선조 24)에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또 교동이 수군의 중심지로서 부각되었던 까닭에 육상의 산성은 그 규모에 비하여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37년에 산성을 개축하여 통어영의 신지(信地)로 삼았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화개산성은 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하여 사전에 준비된 병력 집결지였으며, 해상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하였을 경우를 대비한 육상 예비 진지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고 증개축에 관한 기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에 왜구의 침입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증축하고 성내에 군량고를 두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1737년에 다시 개축하고 군창을 두었다.

화개산성은 축성 재료와 규모의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문헌기록을 종합해 볼 때 꽤 규모가 큰 산성이었던 듯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석성으로서 둘레는 1565보이며 그 내부에 연못과 샘이 각각 1개소씩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리지들에서는 석축의 둘레가 3543척, 높이는 18척인 산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전국유적총람≫은 산성의 둘레를 2km로 표시하고 있어서39) 육군박물관의 실측 결과인 2168m와 가장 유사하다.


Ο 제31호 박두성 생가터

  • 지정번호 : 31호
  •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5,516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를 만들었다면 일본식의 어려운 점자를 한글 점자로 창안하여 교과서까지 출판한 훈맹정음이 있다. 하지만 훈맹정음의 창시자 송암 박두성(朴斗星)이 강화+교동면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박두성 선생은 한평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오랜 시간 한글점자 창안에 매진한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반포했다.

점자를 사용하기 전에는 두꺼운 종이나 목판에 글자를 새겼으며, 철사나 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640년대에 들어 겨우 두꺼운 종이에 활자로 찍어 만든 선문자가 고작이었다. 조선 시대부터는 대나무를 이용한 죽력을 사용하였다. 약 20㎝ 길이의 대나무 가지에 선을 이리저리 파서 크고 작은 달과 절기, 일진 등을 표시하였고, 60개를 묶어 만든 책력(冊曆)이 있었다,

최초의 점자는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야간전투 시 전투 문자로 고안했지만 읽기가 어려워 군사용으로는 실패했고 맹인용으로 보급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898년 미국 선교사 홀(HalI. R.S.)이 뉴욕의 점자를 들여와 변형시킨 이른바 ‘평양 점자’로 평양에서 맹인 여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영어와 한국어의 문자조합 방식이 달라 국내에 정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박두성은 제생원 맹아부(현 국립서울맹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맹인들이 졸업 후 침구술, 안마업계 등에 종사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하면서 늘 일본의 점자로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당시에는 일본어로 된 점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두성은 일본의 살벌한 감시를 피하여 비밀리에 8명의 학생과 함께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한글점자 연구를 본격 시작, 우여곡절 끝에 1926년 11월 4일 ‘또 하나의 한글’ 훈맹정음을 반포했다. 송암이 점자로 보급한 책은 ‘한글점자 쓰는 법’ ‘훈맹정음의 유래’ 등 초고를 비롯하여 총 76점이다.

훈맹정음으로 시각 장애인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음은 물론 자신감과 독립심, 사회생활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문자 이상의 더 큰 의미가 탄생된 것이다. 특히 훈맹정음은 광복 후 한글점자 투표까지 가능하여 시각 장애인도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Ο 제32호 동진포 석축나루터

  • 지정번호 : 32호
  •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64-5

동진포는 교동읍성이 축조된 후 사용된, 교동에서 조선시대에 가장 규모가 큰 포구였다. 황해도에서 오는 세곡선이 주로 머물렀으며, 서울ㆍ인천ㆍ해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대부분 강화도를 오가는 어선들은 이 포구를 이용했다. ‘교동군읍지’를 보면, 이곳은 교동팔경 중 하나로 동진송객(東津送客)이라 해서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광경이 볼만했다고 한다.


Ο 제33호 고구리 한증막

  • 지정번호 : 33호
  •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233

조선시대 한증막 중 전국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진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의 한증막 이다.

교동도에는 조선시대 한증막이 여러 개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고구리 한증막과 수정산 한증막이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고구리 한증막의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둘레 15m, 직경 4.5m, 높이 4.5m 규모로 1960년대 초반까지 동네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하였으며 이후 문화재돌봄사업으로 관리되고 있다.

< 출처 :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