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옛 관아 터(址)

Ο 고려 이궁지

  •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 13호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404-1
  • 기타 : 사유지로 접근이 어렵고 관리도 할 수 없다

이 궁지는 옛 고려시대 사찰인 흥왕사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 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건립 되었다고 전한다. 이 궁은 왕이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으로서 역대 고려 왕조는 특히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많은 이궁을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은 멸실되고 페허화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현재는 축대 일부와 주초석이 남아있다.


Ο 형방터

형옥은 옥터라 부르는데 동헌의 남쪽에 있었다. 조선후기까지 형방으로 사용하였다가 일제강점기때에는 농산물검사소로 사용하였다. 2018년 도로 공사로 철거 하였고 그 부재만을 강화군에서 보관하고 있다.


Ο 정족산 가궐지

 

  •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1호
  • 소재지 : (23050)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9번지(온수리, 전등사)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고종이 건립 했던 가궐터이다. 당시 백승현이 낭장으로 재임시 고종이 적당한 가궐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하고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변국의 대국들이 조공 할 것이라고 건의 하자, 왕은 대장군 조문주, 국자제주 김구, 장군 송송례에게 가궐을 짓도록 명하여 완성 하였다 한다.

당시 가궐의 건물은 몽고병이 침입해 왔을 때 소실 되었다 하며 당시에는 이 가궐에서 왕이 거쳐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의 생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Ο 연산군 유배지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유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유배지는 교동면 고구리 연산골에 있다.


Ο 삼도수군통어영지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남산에 있는 삼도수군통어영은 1629(조선 인조7년)에 한성 방어를 위하여 남양 화량진에 설치되어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다음, 인조11년(1633)에는 3도(경기·황해·충청) 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 서쪽 해안에다 설치 하였다.

이곳에는 수군을 훈련하던 훈련장 및 정박시 배를 묶어 놓았던 계류석 1기가 현존한다.


Ο 교동부지

1629년(인조7)년 경기수영을 교동현으로 옮겨 교동도호부로 승격된후 지어진 관아터이다. 누각기둥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기둥과 안쪽에 계단일부가 남아 있다.


Ο 조선시대 경기수영(지)

교동면 읍내리 교동읍성은 지방 관아인 경기수영이 마을을 수호하기 위하여 1629년에 세워졌다.

성의 둘레는 약 779m로 남·동·북쪽 3곳에 성문이 있었지만 자연재해로 모두 붕괴되었다. 이후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무지개 모양의 홍예만 남아있던 남문 유량루(庾亮樓)가 2018년 완공됐다.


Ο 고목근현지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있는 이곳은 고구려 때 고목근현(古木根顯)을 설치한 이래 조선 인조 7년 도호부로 승격되어 읍치(邑治)를 읍내리로 옮기기 까지 관아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성의 길이는 약1200m 정도이며, 4개소의 문(門) 및 관아터와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Ο 교동 고읍성

교동 고읍성은 둘레가 1171m로서 극히 일부분만 석축이 남아 있고, 토성만 잔존하거나 논 또는 민가로 인하여 멸실된 상태이다. 이 성은 동·서·남·북문지를 추정할 수 있는 장소가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4문이 구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에는 타원형 연못과 장방형 관아터가 발견되고 있으며, 성 외부에서는 원형 감옥터가 발견되었다.

본래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으나 후에 교동이 되었다. 문헌 자료가 없어서 그 실체를 밝히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이후 폐성되어 그 가치를 상실했던 듯하다.  < 출처 :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