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천주교•성공회

Ο 강화 기독교의 확산경로

1893 강화교산교회
1896 홍의교회
1897 건평교회
1897 고부교회
1899 교동교회
1899 송가교회
1899 피뫼교회
1900 망월교회
1900 잠두교회
흥천교회
1934 온수교회

 

 

 

 

 

 

 

 

 

 

 


Ο 초대 강화 교산교회

강화에 감리교와 성공회가 처음 전파된 것은 1893년 같은 해였으나 그 전래과정은 달랐다. 성공회는 1894년 정부에서 갑곶이에 설립한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강화읍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감리교는 그렇지 못해 강화 북서쪽 해변마을 시루미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시루미(현 양사면 증산마을)에 첫발을 내디딘 선교사는 미 감리회 소속 존스목사였는데 그는 1892년 여름부터 인천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한강 뱃길을 이용해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눈여겨 본 강화에 복음을 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갑곶나루를 거쳐 강화읍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남문에서 입성이 거부되어 그의 첫 선교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존스 목사의 강화 선교의지가 현실화된 것은 1893년 강화 북서쪽 해안 서사면(지금의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의 이승환 덕분이었다. 그는 인천에서 주막집을 경영하였는데, 당시 내리 감리교회 신도들이 하던 ‘계’모임에 참여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고, 매주 성경 공부를 통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술장사에 대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던 그는 술장사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모친에게 신앙을 전파하여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의뢰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존스 목사는 시루미 해안에 도착하여 이승환의 집으로 가려 했으나 다리목 마을의 김초시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이승환은 결국 모친을 등에 업고 선교사가 있는 배에 올라 모친과 함께 선상세례를 받게 되니 강화에서의 첫 세례예식이었다.

이로써 강화교회의 첫 세례 교인이 탄생하였고, 존스는 인천의 이명숙권사를 시루미로 파견해 이승환의 집에서 집회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그후  시루미에 신도들이 늘어 신앙공동체가 탄생되었다. 이 공동체는 서사교회, 교항교회, 교산교회, 양사중앙교회 등으로 불렸는데, 현재의 강화교산교회’, 곧 강화의 첫 감리교회이다.

Ο 강화초대 기독교 선교 역사관 

감리교회 초창기 교회의 모습을 한 눈에 엿볼 수 있는 강화초대 기독교 선교역사관에서 기독교 120년

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교산교회 입구에 구한말 시루메 마을에 사는 이승환이 기독교를 배척하던 당시 주민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어머니를 등에 업고 인근 해안으로 나가 배 위에서 어머니와 함께 세례를 받은 선상세례의 조형물과 초창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강화도 지역의 복음전파 경로, 교산교회를 비롯해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자는 뜻에서 이름 끝 자에 한 일자를 넣어 개명했던 홍의교회 이야기민족의식을 일깨우며 강화도 교육의 산실이 됐던 흥천교회 등 선교100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Ο 강화의 두번째 근대교육기관 홍의교회와 잠두교회(현 중앙교회)

‘홍의마을’의 선교는 1896년 서당훈장 박능일이 교산교회 김상임을 만나면서 시작하였다. 박능일의 선교로 종순일, 권신일 등이 입문하였고, 1년 후 신도는 80명으로 늘었다. 당시 신도들은 선교사의 도움없이 토담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서당을 학교로 바꾸어 신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성공회의 갑곶이학교(후의 진명학교)에 이은 강화의 두 번째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홍의교인들은 한국복음전래사 중 독특한 두 가지 형태의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교인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들의 이름을 신앙의 의미로 새롭게 바꾸었다는 것이다. 성은 그대로 두고 이름 중 끝자를 한 일(一) 자 돌림으로 하고, 가운데 자는 신앙적 의미를 지닌 ‘충(忠)’·‘신(信)’·‘은(恩)’·‘혜(惠)’·‘능(能)’·‘경(敬)’·‘천(天)’… 등을 적어 넣은 함에서 제비 뽑아 정하였다.

이는 “한날 한시에 믿었으니 같은 형제, 한 가족이다.”이라는 의미였다. 이후 홍의교인들은 모두 ‘일’자 돌림을 쓰게 되었고, 부자지간에도 같은 날 믿기 시작하면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어 부자지간이 형제지간처럼 되기도 했다. 이처럼 항렬을 따라 집단적으로 이름을 바꾸는 습관은 교동에서는 ‘일’자 대신 ‘신’(信)자 돌림으로 바뀌었고, 강화읍에서는 학교 이름을 지을 때도 이를 적용하였다. 합일학교가 그 예이다.

홍의교인들은 강화의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하는 주역이 되었다. 권신일·혜일 부자는 서쪽 교동으로, 종순일은 남쪽 길상으로, 홍의교회를 시작한 박능일은 동쪽 강화읍으로 진출해 1900년에 잠두교회를 시작하였다.

이후 강화읍 잠두교회는 기타 지역 복음 확산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잠두교회의 개척자는 박능일·김봉일·권신일·종순일·윤정일·정천일 등이었다.

 


Ο 천주교

강화 천주교성지

병인양요 이전 강화지역에 천주교가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알 수 있는 교회의 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다만 병인박해를 기점으로 강화에서 순교한 신자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천주교 신자들이 병인양요 이전에 강화에 있었음을 알 수는 있으나 이들이 어떤 경위로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1801년에 순교한 황사영이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입교시킨 사람들중 그의 숙부 황석필도 있었다.  그리고 저자 미상의 ≪눌암기략≫에 “언국이 강도에서 취식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황사영의 숙부 황석필은 한때 강화에 기거한 적이 있었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황사영 사건 이후 강화가 천주교와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시 이용되던 부경사행로의 이용이 여의치 않게 되고 의주·변문의 국경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신자들은 육로로 이어지던 중국 선교사들과의 접촉 방법을 바꾸어 해로를 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강화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중요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지나쳐가기만 하던 강화에 첫 발을 내디딘 이는 프랑스 선교사 리델신부였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선교가 아닌 병인년 10월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를 점령할 당시 그들의 통역 및 뱃길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 함대에는 두 명의 해군 군종신부도 동승하고 있었는데, 리델의 주선으로 강화의 불우한 소녀 김 엘리사벳이 갑곶이군영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강화에서 베풀어진 공식적인 첫 세례 예식이었다. 프랑스군의 강화읍 점령과 정족산성전투는 리델의 선교자유 획득 소망과 달리 교회에 대한 대대적 박해로 이어졌다.

프랑스 함대를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과 원윤철이 1866년 10월 순무영에 넘겨져 양화진에서 효수형을 받았고, 1868년 5월에는 강화에 살던 천주교 신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나루에서 참수되었고, 최인서, 장치선, 박순집의 형, 50세 된 조 참봉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1870년에는 통진 출신 권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병인년 이전에 뿌려진 작은 신앙의 씨앗들은 이렇게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순교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Ο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사적 제424호

성공회 첫 개척자 코프, 고요한 주교가 한국에 도착한 1890년대는 비록 통상조약 등으로 선교사들에게 상당한 자유가 있었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은 제한된 구역에 거주해야 했고 입국비자도 교역과 관광 이외에는 허가되지 않았다.

한국어 공부를 위한 교사를 구하는 일도 어려웠고 신앙에 관계된 서적은 성서를 포함해서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코프 주교와 선교사들의 당면한 과제는 한국어와 한자를 배우는 것과 적절한 거주지를 물색하는 것이었는데, 서울 100리 이내 지역에서만 여권없이 합법적인 통행이 가능했기에 자연 그들의 활동 반경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893년 코프 주교는 직접 갑곶이에 와서 지방형편을 살피고 선교 가능성 여부를 탐사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외국인의 강화 성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코프 주교는 우선 갑곶나루터에 선교거점을 마련하기로 하고, 그 해 7월 워너신부를 파송하였다.

워너 신부는 강화 외성 출입문인 진해루 밖에 있던 나루터 근처에 조그만 한옥을 월 6달러에 세내어 기도소와 거처로 삼고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새 선교소가 마련되자 1894년 1월 20일 코프 주교가 이 집을 성 니콜라 회당으로 명명하였다.

이 회당은 강화 최초의 성공회 선교사업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갑곶이 니콜라회당만으로는 강화선교를 감당하기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선교본부를 물색하였다. 마침 갑곶 조선수사해방학당의 영국인 해군 교관 콜웰 예비역 대위 부부와 그의 부관 커티스 부부가 살던 동문 안 고가를 1896년 5월 매입하여 선교 본부용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

트롤로프 신부는 새로 구입한 고가에 자리를 잡고 기도소와 어린 학생들의 공부방을 마련하고, 1897년 6월 코프 주교는 기도소를 성 바우로회당으로 축복하였다. 힐러리와 로스는 갑곶의 니콜라 회당에 남아 워너 신부가 양육하던 고아와 새로운 입문자를 교육하는 한편 각처를 순방하며 주민들을 치료하였다.

교회가 발전하자 트롤로프 신부는 250명의 신자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새 성당 신축을 구상하였고, 그 결과 강화 시가지가 잘 보이지 않던 옛 임시 회당에서 서쪽으로 300m쯤 떨어진 언덕을 새 성당 부지로 확정하여 700평 정도를 매입하였다. 새 성당터는 해외복음전도협회의 지원금으로 마련되었다.

선교사의 숙원이던 새 성당 건축은 메리옷 기금 500파운드를 비롯하여 총 1000파운드의 거액의 예산을 들이는 대공사였다.

트롤로프 신부는 1899년 가을부터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설계, 계약, 목재 구입까지 직접 관여하였고, 신도들도 한마음이 되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독교의 서구문화가 조화를 이룬 한옥 건축양식과 서구의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 완공을 위해 기도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년 간의 노고 끝에 성 베드로와 바우로성당이 완공되어 11월 15일 코프 주교의 주례로 축성되었다.

강화 성공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토착화를 시도한 첫 건물을 완공함으로써 한국 선교의 견고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Ο 온수리 성공회 성당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강화 온수리성공회 성당은 1898년 트롤로프 선교사가 사제관과 함께 건립하였다. 성당 건축 후 영국인 외과의사 로우스가 이곳에서 진료활동을 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온수리성공회 성당은 사적 제424호인 성공회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합각면으로 출입구가 나 있는데, 이는 예배에 따른 평면활용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성당 건물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삼문 형식의 종루가 있는데, 원래의 정문으로 생각된다. 종루는 전통적인 솟을삼문 형식을 많이 변형시킨 건물이다. 종루의 양쪽 칸에는 조그마한 공간을 두어 창고를 사용하는데, 벽체의 하부는 성당건물과 마찬가지로 적벽돌로 둘렀고, 상부는 회벽에 목재 창호를 내어 채광하였다.

종루의 중앙 칸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층은 문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지만 문을 달지는 않았다. 상층은 종루로서 서양식 종이 걸려있으며 줄이 아래층으로 드리어 있어서 종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종루의 기본적인 가구법은 한식목조가구조이며 간결한 납도리 형식이다.

성당의 앞쪽으로 3기의 비석이 있는데, 1기는 터너의 기념비이고 나머지 2기는 모두 트롤로프의 영세기념비이다.


 

Ο 온수리성당 사제관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52호

강화 온수리성공회 사제관은 강화 온수리성공회 성당과 함께 1898년 트롤로프 선교사가 건축하였다. 이후 사제관은 많이 퇴락했으나 1933년에 이르러 원형 그대로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사제관이란 성직자가 거처하는 곳으로서, 선교 당시의 소박하고 순수한 토착미를 엿볼 수 있는 건축미가 그대로 살아 있다. 사제관은 강화 온수리성공회 성당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一”자형의 대문과 “ㄷ”자형의 안채 공간이 종으로 배치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이 멸실되고 흔적과 계단 등 주초 자리만 남아 있다.

건물의 구조는 목구조이며 납도리 5량가(五梁架)로서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변형한 한식기와지붕이다. 기단은 화강석 1단을 쌓은 기단위에 주초를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다. “ㄷ”자형 안채로 들어서면 마당을 가운데 두고 대청마루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부엌과 사제방, 대청, 작은방, 건너방, 협문, 사랑방의 순서로 배열되었다. 한편 협문은 사제관과 본당과의 통로로서 1칸으로 되어 있는데, 건넛방과 사랑방 사이에 위치하여 사랑방을 별개의 공간으로 구성하는 특징을 보인다.

대청은 통칸으로 하였는데 바닥의 원형은 우물마루이나 널마루로 바꿨으며 연등천정을 하고 있다. 대청의 전면에는 문을 달아 마루방을 구성하고 그 전면에는 툇칸을 설치하고 유리문을 달아 외부와 구별하고 있다.

강화 온수리성공회 사제관은 전통적인 한식건물에 서구문물이 수용되어 변형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 특히 영국식 주거생활문화가 한국 전통 주거건축 속에 적응한 결과를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개실(個室)중심주의와 가족의 단란을 중시하는 거실중심주의라고 하는 양자론적인 영국식 주거문화의 특성이 엄밀한 개실이 확보되기 어려운 한식 건물에 변형되어 적응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강화 온수리성공회 사제관의 건축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제관은 2002년 8월 다시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출처 : 강화군, 교산교회, 성공회강화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