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집성촌

▣ 강화읍 남산리 부조마을의 함열 남궁씨

   남궁씨는 단일본으로 18대손 대사성 침(沈)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침의 막내아들인 영(泳)은 16세 중엽 가선대부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강화로 낙향하게 된다. 정착한 곳이 ‘수록암(壽祿菴)’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록암은 남산리 남궁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산리 중심가를 ‘남궁촌’으로 불렀으며, 이는 남궁씨가 정착하고 집성을 이뤘기 때문에 생긴 지명일 것이다. 현재 7개파로 분파되어 있으며 대사성파는 주로 강화와 김포에 거주하고 있다. 남궁씨는 강화에만 약 132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으며, 남궁촌 외에 불은면 삼동암리(10여가구)·양도면(20여가구)·강화읍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5일에 지내며 재실은 남궁촌에 소재하고 있다.

▣ 선원면 연리의 파평 윤씨

   연리는 연동·연화(간대말)·능진·용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리에는 약 102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연화에는 36호, 연동에 20호, 능진에 20호, 용진에 10호 정도가 각각 흩어져 살고 있다. 논과 밭의 비율이 약 8 대 2 정도로 논농사가 많은 편이다. 예전에는 인삼을 많이 했으나 최근에는 하우스(딸기·오이 등)작물과 고추, 버섯재배(느타리버섯)을 많이 하고 있다. 노인회는 연화와 연동이 통합되어 있으며 약 50여 명이 가입되어 있고 능진은 5년 전에 따로 분리되어 약 40명 정도가 가입되어 있다. 연리 공동으로 청년회가 구성되어 있다. 상포계(상여계)의 경우 연동과 연화 공통으로 50가구가 가입되어 있고, 능진은 7∼8년 전에 따로 분리되어 25가구가 가입되어 있다.

   연리에는 연화에 파평 윤씨가, 연동에는 안동 권씨가, 능진에는 양천 허씨가 각각 집성을 이루고 있다. 파평 윤씨의 경우, 기세조는 고려 건국 공신이며 시중벼슬을 지낸 윤신달(尹莘達)로 알려져 있다. 태위공파(太尉公派)의 경우 21대손에 해당하는 윤덕명(尹德鳴)이 병자호란 직전에 강화로 낙향하면서 강화에 후손이 퍼지게 된다. 낙향시 득부(得扶)와 득립(得立) 두 아들도 함께 들어오게 된다. 병자호란시 차남인 득립은 전사하고 그 부인 용담 염씨 역시 자결하여 나라에서 열녀정문을 내렸다. 처음 낙향지는 선원면 연리 연화마을이라 하며, 그로 인해 연화를 ‘윤촌말’로 불렀다고 한다. 덕명의 손자대에 능골(능진)로 이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원래 능진에는 양천 허씨가 먼저 정착하고 있었으나 능골(능진) 중에서도 윤씨가 정착한 이 지역을 ‘신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현재 능진에는 장자인 득부의 후손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차남의 후손(종손 : 윤종돈, 35대손, 연화거주)들은 주로 연화에 거주하고 있어 현재 연리에만 태사공파 후손들이 30여호 거주하고 있다.

  파평 윤씨(태사공파)의 시제일은 다음과 같다.

원시조 시향 : 경북 영일(음력 10월 1일) → 윤관장군 시향 : 경기도 파주(음력 10월 3일) → 태의공 시향 : 경기도 의정부(음력 10월 5일) → 윤덕명 시향 : 연리(음력 10월 15일)

▣ 양도면 인산리의 성산 전씨와 평산 신씨

   인산리는 1리인 양지왕방·음지왕방·호박골·별밭과 2리인 황골·더치·다락말로 구성되어 있다. 인산리는 총 250호 정도 거주하고 있으며 성산 전씨는 약 12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논과 밭은 약 8 대 2 정도이다. 노인회에 약 90명 정도 가입되어 있으며, 청년회는 약 30명 정도 가입되어 있다. 그 밖에 작목반(포도작목반)·부녀회·상부·전부계가 구성되어 있다. 전부계는 ‘장지포전부계’라고도 하는데 삼흥·건평·외포·인산리가 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000평 정도의 공동농지에 대한 양수·배수에 관한 공동관리를 하고 있다.

성산 전씨는 중시조를 대평(大平) 흥(興)으로 삼고 있는데, 흥은 자식 5형제, 즉, 인·의·예·지·신을 두었다. 283대손에 해당하는 막내 신은 고려 말에 조선의 관직을 사양하고 강화로 낙향하였다. 낙향하여 정착한 곳이 바로 양도면 인산리이다. 신의 덕을 흠모하여 왕이 방문하였다고 하여 ‘왕방촌(王訪村)’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뒷산 역시 나라에서 하사하였다고 하여 ‘국사봉(國賜峰)’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