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시대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하늘과 자연을 숭배했고,그것을 거스르면 큰 벌을 받는다고 믿었다. 하늘과 통한다는 제사장 겸 부족을 다스리는 부족장이 죽으면 새로운 족장은 죽은 자의 권위를 기리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 할 수 있는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었다.

부족의 힘과 마음을 모아 채석을 하고 받침돌을 세우며 덮개돌을 올려 만든 무덤방에 비파형 동검과 청동방울, 토기 등과 죽은 자를 넣고 막음돌로 막아 고인돌을 완성한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각은 마음을 모으면 하늘이 희망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하늘의 모습을 상징하며 단지 돌무덤이 아닌 하늘과 땅, 사람을 이어주는 의미였다.

고인돌은 주로 산과 인접된 평지 또는 강가에 많게는 수백에서 수십 기까지 밀집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고인돌의 축조집단들이 일정한 범위를 형성하면서 영역 권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선사시대
    선사시대는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대로 인간이 처음 출현해서 글자를 만들고 역사를 기록하
    기 전까지 수만 년에 달하는 인류 역사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구석기와 신석기·청동기 시대를 말하며 문자 출현 이후를 역사시대라고 한다.

 

가. 구석기시대
농사를 짓지 못하던 구석기 시대에는 먹을거리를 찾아 이동 생활을 했다.

생활 도구는 그냥 돌이나 단순하게 깨뜨리고 떼어낸 돌을 사용하다가 점점 발전하면서 돌을 날카롭게 갈아 쓰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주로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생활하면서 날씨가 따뜻할 때는 강가나 들판에 나무줄기나 가지 등을 엮어 간단하게 막집을 짓고 동굴의 벽에는 들소, 사슴, 말, 곰 등 의 사냥감을 그려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초보적인 예술 활동도 하였다.

강화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시행되지 않았다. 다만 하점면과 내가면에서 유물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구석기의 주거지로 알려진 동굴은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중요한데 양사면 교산리 성덕산 금정굴이 확인되었으며, 금정굴은 입구가 정남향인 수평 굴로 입구 높이가 1.3m 너비가 1.2m에 이른다.

나. 신석기시대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구가 크게 달라지며 발전한 돌을 날카롭게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사용하였다.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조리하거나 저장하였고 신석기 초에는 이른 민무늬토기(원시 무문토기)와 덧무늬토기를, 중반부터는 빗살무늬토기를 주로 사용했다. 빗살무늬 토기는 유일하게 한반도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식량은 구석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냥과 채집, 낚시 등으로 먹거리를 해결하였지만 콩이나 조, 피, 수수와 같은 잡곡을 심어 초보적인 농사형태도 갖추었으며 가락바퀴로 실을 뽑아 옷감도 만들고 강가나 해안가에 움집도 짓고 살았다. 멋진 장신구를 만들어 몸을 가꾸고 종교도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물들은 원시인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여 이루어진 조개더미 속에서도 발견된다.

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었으며 농경도 훨씬 발달하였다. 신분에 따른 차별과 함께 계급사회가 나타나고 영토를 넓히기 위한 싸움도 잦아지며 무기도 발달하게 된다. 따라서 돌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찾다가 만들어 낸 것이 구리에 아연을 섞어 만든 청동이며, 곧 청동기 시대로 발전한다.

청동을 녹여 원하는 모양의 거푸집에 용액을 넣으면 다양하면서 같은 여러 개의 청동기 제작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청동기
는 만들기도 어려웠고 재료도 귀했기 때문에, 지배 계급의 더욱 날카롭고 강력한 청동 무기나 장신용을 만들어 권력자들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 사용하였다.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면서 고인돌을 비롯한 다양한 거석 기념물도 이 시대에 만들어지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이
“한반도에는 청동기 문화가 없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연구가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문화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해방을 맞으면서 여러 유적지의 발견과 유물들을 발굴하며 발전하였다.

강화도는 사방이 바다로 제한된 섬 지역에서 대규모로 밀집한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고인돌이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것만 확인될 뿐 이와 관련된 생활, 주거유적에 대해 조사는 1967년 삼거리 소동마을의 고인돌 조사 시 우연히 발견된 1기 이외 명확하게 확인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최근 48번 국도공사 시 여러 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어 강화지역의 청동기 시대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고인돌은 1967년 삼거리 고인돌 각형토기 주거지 발굴조사와 2000년 선문대에서 실시한 오상리 고인돌 군 발굴조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고인돌 분포를 확인하는 수준의 조사였기 때문에 자세한 성격은 알 수 없다.

  • 지배자의 상징 청동 검
    농사가 시작되는 신석기 말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좋은 땅과 남은 농산물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함께 싸움이 잦고 무기도 발달하여 돌도끼를 쓰던 세력들은 점차 청동 검을 사용하는 세력들에 의해 항복하고 지배를 받게 되어 더 큰 나라가 만들어진다.

고조선도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나 초기의 청동 검은 강도가 약하여 무기로서의 사용보다는 지휘자로서의 의미 또는 제사장이자 족장의 하늘과 땅을 잇는 영험한 도구로 사용
하였으며 실제 무기는 철기시 대부터이다. 당시 고인돌 무덤방에 족장의 시신과 함께 여러가지 물건들을 묻었는데 이것이 고인돌과 함께 고대 국가형성과 우리 역사의 귀중한 유물이다.

2)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
비파형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검코(칼 자루와 날 사이의 볼록 내민 부분)가 없고 평남 덕천시 남양과 평양시 상원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세형동검은 고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한반도 청천강이남 지역에서 발견돼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
으로 보고 있다.

  • 제·정 일치 시대 족장과 제사장
    청동기 시대의 지배자는 제사를 지내는 권한과 정치를 하는 사람이 동일한 제정일치 사회였다.

농사가 발달하면서 남는 곡식이 생겼고, 무리 사이에 다툼이 잦았다. 다툼이 잦아지면서 마을을 지킬 힘이 필요하게 되자 힘 있는 사람을 우두머리인 족장으로 선출하였다. 족장은 청동 검을 들고 전쟁을 치르는 한편 농사의 풍요를 빌며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사실은 청동기시대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단군(檀君)’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제사장’을 뜻하고 ‘왕검(王儉)’은 정치적 지배자인 족장을 뜻한다.

족장은 청동방울과 청동 검을 손에 들고 흔들면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이끌었고 청동거울을 태양에 비추어 반짝이는 빛을 내며 하늘과 교신하는 일종의 무전기로 부족 원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 계급사회의 발생
    전쟁이 거듭되면서 족장의 지위는 높아지게 되고 무기만을 전담으로 만드는 사람, 힘이 센 사람은 농사일을 그만두고 무사(武士)로 활동하며 이들은 차츰 같은 무리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위치와 역할을 차지하였다. 여기에다 전쟁에서 이기면 진 쪽의 사람을 끌고 와 노예로 부렸다. 이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이 뚜렷해졌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이것이 바로 인간 불평등의 출현이 있으니 곧 계급의 발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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