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건물이다. 전등사의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을 것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은 조선중기의 목조건축물로 판단된다. 1916년 대웅전 수리때 발견된 〈양간록〉의 내용은 조선시대 이 건물의 중건 및 수리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1605년(선조 38)에 대웅전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로부터 10년도 되지 못한 1614년(광해군 6)에 다시 불이 나서 대웅전 전체가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해빙과 더불어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1621년에 서까래를 얹었다는 것을 보아 대체로 이 시기에 건물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수법을 보면 기단(基壇)은 지형에 따라 동쪽이 높고 후면과 서쪽이 낮은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높은 기단을 조성하였다. 그 위에 막돌초석은 놓고 민흘림원기둥(배흘림)을 세웠으며 창방(昌枋)으로 기둥 윗몸을 결구하여 그 위에 평방(平枋)을 놓았다. 공포(慊包)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외부로 뻗은 살미첨차(山彌쿊遮)의 끝을 보면 초제공(初諸工)과 이제공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으나, 삼제공은 수서(垂舌)로 되어 있고 섬약하게 길어지고 곡률이 심하여 조선중기 이후의 다포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공포는 제공 끝이 판형으로 되어 있으나 기둥위만은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어 있다. 공포의 배치는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2구, 양측면의 어칸(御間)에는 3구, 변칸(邊間)에는 2구씩 두었다. 가구(架構)는 내부에 고주(高柱)를 세우지 않고, 대들보를 앞 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량을 받치게 하고, 여기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는데 천장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또 양 측면의 어간 평방에서 보머리(樑頭)에 용머리를 조각한 충량(衝樑)을 걸었다. 불단위의 닫집은 처마를 정자각모양으로 꾸미고 16개나 되는 공포를 포개서 배열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투각한 장식판과 부룡(浮龍)·극락조 등을 매달아 놓았는데 능숙한 조각공의 솜씨가 잘 발휘된 수준급의 장식이다. 지붕 위 기왓골 끝에는 백자로 만든 연봉이 올려져 있다.

대웅전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은 처마곡선이 잘 처리되어 매우 아담한 느낌을 주는데, 이 건물에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외부에 나신상(裸身像)의 목조장식이 네귀퉁이 보머리 사이에 끼워져 있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 짓던 도편수(都片手)의 순정을 배반하고 그가 믿고 맡긴 돈을 챙겨 달아난 아랫마을 주모가 벌을 받는 형상이라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건물의 정면에는 모두 삼분합(三分閤)의 궁창판이 있는 빗살문을 달았는데, 2짝을 열어 겹쳐 올려 부연(副椽) 평고대(平高臺)에서 내린 들쇠에 걸리도록 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의 본존불로는 목조로 된 석가·아미타·약사여래의 삼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세불은 1761년(영조 37)에 대연(大演)대사에 의해 개금되었다는 기록이 ≪전등본말사지≫에 보인다. 그러나 양식으로 보아서 조선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이다.

대웅전 안에 있는 불화로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후불탱화는 삼세불탱화로서 그림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아미타구품인을 한 부처님을 배치했다.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 아래쪽으로는 관세음·대세지보살이 있고 다시 그 좌우로 각각 아난·가섭이 둘러서 있다. 또 화면 좌우쪽으로는 지장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이, 그리고 화면 끝편 아래위에는 사천왕이 호위하고 있으며, 군데군데 제자들의 모습이 있다. 가운데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윗쪽 좌우에 있는 두 분의 부처님은 분신불(分身佛)인 것으로 생각된다. 크기는 가로 300cm, 세로 202cm이다.

신중탱화는 가운데 그려진 귀왕(鬼王)의 모습이 머리가 셋이고, 팔이 여덟 개에 불꽃 속의 수레바퀴 안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있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신중탱화와는 다른 색다른 그림이다. 또 귀왕의 좌우에 있는 보살·역사·판관 등의 모습도 전통 탱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은 아니다. 아마도 도상(圖像)이나 채색면에서 일본 불화의 영향이 많이 들어간 때문으로 생각된다. 크기는 가로 265cm, 세로 174cm이다.

< 출전 : 신편강화사 @ 무단복제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