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시내관광

조양방직

1990년대 강화도 주력 사업인 직물제조 섬유산업 조양방직이 카페로 새롭게 탄생했다.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놔두고 실내 역시 공장건물 조금 리모델링 한 상태에서 방직기계는 물론 1970년대 생활문화 용품들로 실내를 디자인 했다.

개방시간은 11:00~21:00 연중무휴로 운영하며 주차장은 신문리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문의 : 032-933-2192


 

소창체험관

1938년 옛 평화직물을 리모델링 하여 소창체험관, 소창전시관, 다도체험관, 직조시연관 등 다양한 체험과 강화 직물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입장료 : 무료 /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및 추석당일

문의 : 032-930-3564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元範)이고,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44년(헌종 10) 회평군(懷平君)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살았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용흥궁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개방시간 : 연중 / 입장료 : 무료 /  개방시간 : 09:00~18:00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 21번길 16-1


 

성공회 강화성당

1900년에 한옥으로 지어진 대한성공회 성당이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고요한(Corfe,C.J.)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강화성당은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성당의 전체적인 건물 배치는 서쪽에 출입문을 두어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성당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입구 계단, 외삼문·내삼문·성당·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강화향교

강화향교는 고려 1127년(인종 5) 내가면 고천리(고읍)에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232년(고종 19) 강화읍 갑곶리(먹절)로 옮겼다가 1259년(고종 46) 서도면 볼음도로 옮겼고, 조선 1642년(인조 2)에는 유수 심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옮겼다고 한다.

1627년(인조 7)에는 유수 이안눌(李安訥)이 대성전에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남문 근처로 이건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66년에 유수 이은(李?)이 중수함과 동시에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현재 강화 향교의 건축물은 대성전, 동무와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전은 여러 성현의 위패를 배향하였고, 봄과 가을에 제사(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하는 건축물이다. 명륜당은 향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이다.


 

고려궁지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해인 1232년(고종 19) 6월에 창건되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 궁궐을 지었다고 하였다. 강화도에 국왕과 왕족, 관료와 백성들이 옮겨왔기 때문에 궁궐과 관부가 필연적으로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도에는 정궁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궁궐을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궁의 정문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강화 고려궁은 1270년(원종 11)에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 1631년(인조 9)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등과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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