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제묘

TIP  관제묘()

관우는 오래전부터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중국의 민간에서 각별히 숭배되었다. 송()나라 이후에는 관제묘를 세워 그를 무신이나 재신으로 모시는 등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교에서는 그를 협천대제()·복마대제()·익한천존() 등으로 숭배하며, 유교에서도 문형성제()로 숭배된다.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로 숭배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우 숭배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들을 통해 조선에 전해지기도 했는데, 1601년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왕궁 인근에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관왕묘()가 세워지기도 했다. 줄여서 동묘()라고도 불리는 동관왕묘는 1963년에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강화에는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관제묘가 동·남·북방향에 3곳 남아있는데, 19세기 말이라는 건립연대로 보아 명성황후의 후원에 힘입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Ο  동관제묘

동관제묘는 관우를 모시는 제묘로 강화읍 신문리 합일초등학교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1885년 마여인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관제묘에 들어서는 외삼문 앞에는 “금잡인(禁雜人)”이라는 금표가 세워져 있다.

외삼문은 조성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헌랑묘(東軒廊廟)”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관우와 백마·흑마가 각각 짝을 이룬 그림이 걸여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충성전(忠聖殿)”이라는 편액이 걸린 묘당이 있다. 충성전은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1960년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내부에는 1883년(고종 20)에 만들어진 “위진사해고금일인(威振四海古今一人)”이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으며, 관운장을 비롯하여 유비현덕과 장비 등이 모셔져 있다.

현재 동관제묘는 무형문화재 제8호 외포리 곶창굿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는 정정애가 관리하고 있다.


Ο  남관제묘

강화읍 신문리에 있으며 동관제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남관제묘는 1884년 판관 오상준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입구에는 동관제묘와 마찬가지로 “금잡인”이라는 금표가 세워져 있다. 입구는 외삼문으로 구성되었는데, “관제묘(關帝廟)”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요사가 있고, 정면에는 “현성전(顯聖殿)”이라는 편액이 걸린 묘당이 있으며, 묘당의 왼쪽 뒤편에는 콘크리트 건물인 대성전이 있다.

현성전은 “광무8년갑진중하중건(光武八年甲辰仲夏重建)”이라는 편액의 기록으로 보아 1904년에 중건된 건물임을 알 수 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익공은 전체적으로 미려하다고 평가되며, 창방 위에 소로를 촘촘하게 배치하여 도리를 받치게 하여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켰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합각부의 장식도 수려하고 용마루에서 내려오는 귀마루와 내림마루가 만나는 곳에는 용두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건물의 각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으나, 마모되어 그 내용을 살펴보기 어렵다.

내부에는 내진(內陣)을 설치하고 닫집을 두어 관우상을 봉안하고 있다. 관우상은 목조로 이루어진 의상(倚像)이다. 전체적으로 검붉은색을 띄고 있으며, 갑옷이 조식되어 있으나 현재는 붉은 도포가 입혀졌다. 또한 머리에는 금색 사모(紗帽)를 쓰고 있으며, 손에는 지팡이가 있는데 지팡이의 끝에는 매조(梅鳥)로 장식되었다.  현재 남관제묘는 미륵대도 금화종 강화선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Ο 북관제묘

강화읍사무소의 왼쪽에서 뒤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궁골주택 사이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다. 현재 무속인이 거처하는 가정집 내에 외삼문과 묘당이 있다.

북관제묘에 있는 간이 안내판에 의하면 강화산성의 수문장 윤희보가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외삼문은 “관제묘”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1906년에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납도리 팔작집인데, 측면 2칸 중 전면은 툇칸을 내었으나, 현재 툇마루는 없고 분합문으로 마무리하였다. 아무런 현판도 없는 묘당은 최근에 보수를 한 듯 측면의 하부를 붉은벽돌로 마감하였다.

 

 

< 출처 :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