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주변과 충렬사

Ο 참성단(塹城壇)

사적 제136호

참성단은 고려시대부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하는데, 그 명칭이 다양하게 전해 오고 있다. 참성대, 참성초단, 마리산 초단, 마니산 초성단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참성단이라는 표기가 ‘참호를 파고 쌓은 성에 있는 제단’ 즉 마치 해자(垓字)를 둘러놓은 참성의 제단이라는 의미로 가장 적합하게 쓰인다.

마니산 참성단은 ‘북방 민족 세력’의 침략에 대한 항거,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더 이상의 전쟁’을 바라지 않는 평화에 대한 기원과 북방으로의 민족영역 확대를 기원하는 종교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참성단이 축조된 시기는 여러 문헌에 고조선시대에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단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지만 정확하지 않다. 다만 1264년 풍수사인 백승현이 왕에게 마니산 참성에서 친히 초제지내기를 건의했고, 왕이 초제를 거행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참성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고 보면 13세기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참성단이 민족의 성지로 주목받게 된 것은 한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성립한 이후이다. 이때부터 강화는 단군시대 정치중심지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마니산과 참성단은 음양이 만나는 수중산으로 이해되어 마니산 기슭에 단군사당을 건립했던 것이다.

8·15광복 이후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개천절이 제정되면서 참성단은 민족의 성지로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현재 전국체전 때는 참성단 제천단에서 성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리고 있으며, 개천절에는 관련단체를 중심으로 제천행사가 거행되기도 한다.

• 참성단 중수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3호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 최석항이 관내를 순찰하던 중 마니산 참성단이 무너진 것을 발견하고, 당시 선두포 별장 김덕하와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목에게 명하여 새롭게 짓도록 하고 그 보수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가파른 암벽에 가로 50cm, 세로 105cm 크기의 비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 8행 238자를 새겨 넣은 것이다. 중수공사는 10일만에 끝났고 1717년 5월에 비문이 새겨졌다.

[비문]

環東土數千里江都爲保障之重地環江都數百里摩尼爲望秩之名山山之最高處累石爲臺卽所謂塹城檀也世傳檀君築而壇之爲祭天之所云顧年代廈邈風摩雨齧西北兩面太半頹圮東偏階級亦多傾仄州之父老相與咨嗟歡吒者久不己佞添叨居留來守是邦是年春因巡審之役試一登覽慨然有重修之意遂命船頭浦別將金德夏傳燈寺摠攝僧愼黙主基事改築之不一旬而訖工噫興壞捕廢不發舊觀有官守者之所宜勉況檀君生並唐堯之世實爲我東生民之祖壇之說又其園丘禋祀之地而歷數千年汔爲遺民之所瞻敬則修完之擧鳥可己呼愼黙請記始末以視後人書此以識之 丁酉丹陽月行留守崔錫恒記

  • 참성단 소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2호

이 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에 한층 돋보이는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한국의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 마니산 등정문

송면재(1822~1824년) 강화유수가 재임시절인 1823년 10월에 마니산에 올라 남긴 기록으로 자연석 바위에 새겨 놓았다. 마니산 참성단과 참성단 중수비 사이에 있다.

•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

시도기념물 제24호

화도면 문산리는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사그릇(祭器)과 제사물건을 준비하던 재궁이 있던 곳이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때 목은 이색이 지은 시를 쓴 현판이 있었고,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천재암지는 삼단의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넓이는 약 70평 정도로 부근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 금표와 우물들이 남아 있다.

그동안 천재암궁지, 천제암궁지 등 으로 불리다 2020년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로 명칭을 변경 하였다.

• 금표

천제암궁지로 오르는 산길 바로 우측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로 가로 55cm, 세로 61cm의 면적에 금표(禁標갑자팔월(甲子八月()”이라고 새겨져 있다.

금표는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고 마니산에서 벌채를 금하고 관청에서 양목(養木)하는 일을 주관한다는 표시이다.


Ο 충렬사

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

이 사당은 1636년 병자호란 때 남문루 위에서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절한 선원 김상용을 주향으로 하고, 공조판서 이상길외 26명의 위패와 신미양요 때의 충신 어재연의 1위 등 총 28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주벽 위에 모셔져 있는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왕의 명으로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로 들어 왔다. 청나라 군사가 강화에 침입하자 조선의 군사는 대부분 도피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김상용은 이때 성의 문루에 올라 유황을 쌓고 그 위에 올라 앉아 불을 당겨 자폭했다.

김상용이 죽자 나라에서는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정려하고, 강화성의 남쪽 7리되는 곳에 사우를 짓고 충렬이라 사액하여 별좌 권순장과 진사 김익겸 및 이상길 이하 순국선열을 배향했다.

한편 윤집과 홍익한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주전론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청나라에서 순절했다. 당시 홍익한은 죽는 순간까지 숭명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청의 조선침략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고 한다.

현재 화도면 흥왕리에는 홍익한의 택지가 있다. 병자호란이 발발했던 1636년 12월 청나라가 강화를 침입할 때 그가 평양서윤으로 부임하게 되자 어머니를 흥왕리 촌가 화포산장에 피난하게 했던 것이다.

충렬사는 1641년 건립하여 현충사(顯忠祠)라 명명했지만, 1658년에 유수 허휘가 충렬사로 사액을 받았다.

< 출처 : 강화군 / 사진 : 강화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