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36개)

Ο 이규보 묘(李奎報 墓)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무덤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1191년(명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최충헌(崔忠獻)에게 발탁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는 「동명왕편」을 비롯한 2천여 수의 시와 산문은 대다수의 작품들이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동명왕편」은 초기 고구려사 연구와 우리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또한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과 석양(石羊) 한 쌍씩이 세워져 있다. 봉분 하단은 둘레돌이 둘러쳐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묘역의 오른편에 재실(齋室)과 왼편의 유영각(遺影閣)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묘 주변의 석물 중 문무석은 매우 고졸하여 당시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며, 석양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기의 조각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묘역 왼쪽에는 이규보 영정을 모시는 유영각遺影閣이 있고, 오른쪽에는 재실인 백운정사白雲精舍가 있다.


 

Ο 강화 내가 오상리 고인돌(江華 鰲上里 고인돌群)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125-1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이지역의 고인돌을 2000년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에서 발굴하고 오상리 고인돌 군에 포함된 인천시 기념물 제16호 내가지석묘를 중심으로 주변에 12기의 고인돌을 복원하였다. 이 고인돌의 크기는 길이 335㎝로 큰 편이며, 돌방(石室)은 돌널형태로 바닥은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2000년 발굴 당시 석기류는 간돌칼〔磨製石劍〕, 돌화살촉〔石鏃〕, 바퀴날도끼〔環狀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자귀〔石手斧〕, 갈판〔耉石〕등 비교적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토기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그리고 팽이모양토기〔角形土器〕편 등이 출토되었다.


 

Ο 보문사향나무(普門寺 香나무)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828번길 44 (매음리)

보문사 경내에 있는 향나무로 수령이 700여 년에 달한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보문사의 향나무는 보문사 석실(石室) 앞 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이 향나무의 높이는 20m, 둘레는 3.2m 정도이다. 높이 1.7m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동쪽 줄기의 둘레는 1.3m, 서쪽 줄기의 둘레는 1.5m이다. 나무의 형태는 마치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이 보여 기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에는 죽은 것 같이 보였으나 3년 후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보문사 향나무는 보문사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와 앞마당에 있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오래된 나무로서 식물학적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Ο 봉천대(奉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산 63번지

봉천산 꼭대기에 설치하여 하늘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돌을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 형식을 하고 있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이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 와서는 봉화를 켜두는 봉화대로 사용하였다 한다.


Ο 장곶돈대(長串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113번지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강화도 정남향에 위치하며, 1679년숙종 5 축조 당시에는 네모난 형태였으나 변형이 이루어져 지금은 원형의 형태이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장곶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긴곶돈대’라고도 불린다. 해안으로 돌출된 지형에 자리 잡아서 관측과 방어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내부 지름이 31m인 원형 구조로 둘레가 128m, 석벽 높이 210㎝~350㎝이다. 해안 쪽으로 4개의 포좌(砲座)가 설치됐다. 미곶돈대·북일곶돈대·검암돈대와 함께 장곶보에 속했다. 현지 석재를 사용해 1993년에 보수하였다.


Ο 계룡돈대(鷄龍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1679년숙종 5 축조 당시에는 호로곡형조롱박의 형태였으나 변형이 되어 지금은 직사각형 형태이다. 축조 당시 성곽의 둘레는 79보약 94.8m이며, 33개의 첩이 설치되었다. 1679년숙종 5에는 삼도수군통어영에서 직접 관할했으며, 1696년 숙종 22부터는 이곳 계룡돈대에 종9품 별장이 파견되어 망월돈대와 함께 지휘를 했다.

그러다 1759년영조 35부터는 다시 삼도수군통어영에서 직접 관할했다. 지금의 성곽 둘레는 108m에 성벽 높이는 2.9~6.7m이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계룡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광대돈대’로도 불린다.

동쪽 출입문 옆으로 명문(銘文)이 있다. ‘강희 18년 4월 일 경상도 군위어영(康熙十八年四月日 慶尙道 軍威御營)’이다. 강희 18년(1679) 4월 어느 날 경상도 군위현에서 온 어영청 소속의 군대라는 의미이다. 돈대 쌓은 시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명문이다.

계룡돈대는 진보에 소속되지 않고 진무영에서 파견된 천총(千摠) 세 사람이 돌아가며 담당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계룡돈대에서 북쪽의 망월돈대와 창후리 선착장까지 직선거리로 약 5km의 제방이 이어졌는데, 이 거대한 제방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 너른 황금벌판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공을 들여 간척했는지 느낄 수 있다.


Ο 교동읍성(喬桐邑城)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

읍성은 지방행정 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이다. 대개 읍성 안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관리들의 업무 공간이다. 지역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며 비상시에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전에 임한다. 교동읍성은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한 때인 1629년(인조 7)에 쌓았다.

성의 둘레는 약 779m이고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세웠다. 세 문 모두 옹성을 설치했었다.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이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본진이 주둔하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 에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동문과 북문은 어느 때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에 폭풍우로 무너져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부분만 남아있다. 1975년에 해체 복원하고 2018년 문루를 다시 세웠다.


Ο 마니산 참성단 천재궁 터(天齋宫址)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 64-1번지

천제궁 터는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기와 제물을 준비하던 암 터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미 고려 때 축조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마니산 행’ 시가 있으며,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를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왕의 경우 참성단까지 오르기가 힘들었으므로 이곳에서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태종太宗, 1367~1422이 왕위에 오르기 전 정 3품 대언(代言)이었을 때 참성단에 제를 지내기 위해 여기서 머무르며 벽에 ‘동(東)’자 운의 시를 새겼는데, 이후 현판에다 새기고 금을 칠했다고 한다.

1500년연산군 6에는 재궁의 전사청(典祀廳)을 고쳐 지을 때 수군이 직접 양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우 힘들게 지었다는 문헌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국가에서 관리한 암 터라고 보고있다.

천제암 터는 3단의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넓이는 약 70평 정도로 부근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의 금표와 우물이 남아 있으며 건물지도 발견된다.


Ο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甲串나루 船着場 石築路)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53번지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이곳은 정묘호란(1627) 당시 인조가 건넜던 나루터이다. 병자호란(1636) 때에도 봉림대군 등이 갑곶나루로 강화에 들어왔다. 청군이 침략해오자 갑곶나루 부근에서 황선신·구원일·강흥업이 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병인양요(1866) 때에는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상륙해 강화읍을 장악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갑곶나루를 오가는 사람들이 물속으로 수십 걸음 들어가 배를 타고 내려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세종 때에 박신(朴信)이 공사 경비를 부담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선착장 석축로를 쌓았다. 이후 약 500년간 강화와 뭍을 연결하는 중요한 나루로 쓰였다.

이후 박신은 세종이 즉위할 당시 명나라 북경에가서 고명(誥命 : 국왕 인준서)을 가지고 돌아온 공로로 1432년 세종14에 후손들이 대대로 물려받을 수 있는 전지(田地) 65결을 받았다. 날카로운 비판도 망설이지 않는 사관(史官)조차도박신에 대해서는 “곧은 마음에 너그럽고 자애로우며 어질다.”고 평하고,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를 만든 박신의 공로를 사람들이 잊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석축로는 조선 500여 년 동안 강화도의 관문이 되었다. 1920년대에 갑곶나루 위쪽의 용정리에 나루터가 생기면서 그 기능이 떨어졌으나 1937년 6월 30일 동아일보 기사에도 갑곶과 김포 성동리 간에 도선(渡船 : 차량과 우마가 탈 수 있는 나룻배)이 운항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지속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70년 1월 26일 강화교가 완공되면서 나루터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후 주변의 제방 공사로 인하여 원래의 시설들도 상당 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는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Ο 허유전묘(許有全 墓)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강화동로549번길 88 (두운리

고려 후기 충숙왕 때의 명신 허유전의 묘이다.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 출생했으며, 1274년 원종때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직)가 되어 여러 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때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며 1323년(충숙왕 10) 81세의 나이에 원나라에 귀양 가 있던 충선왕을 고려로 모셔오기 위해 원나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발굴 과정에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점, 얇은 청동 조각 여러 점, 나무관에 사용한 쇠못 한 점, 11∼12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으며, 유골인 엉치뼈도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유전 묘 좌측에 강화도 묘역 중 유일하게 시묘살이 터가 있다.


Ο 강화인산리석실분(江華 仁山里 石室墳)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 산 71

고려시대의 석실분으로, 혈구산 서쪽 퇴모산 남쪽 8부 능선에 있다. 이 무덤은 구릉의 경사진 면에 반지하식으로 축조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돌과 깬 돌을 이용하여 직사각형의 네모상자 형태로 돌방(석실)을 만들고 그 앞에는 경사면을 따라 3단의 축대를 쌓아 묘역을 구성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는 축대가 모두 붕괴되어 묘역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주변에 산재한 석실분군

다만 석실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돌무지가 형성되어 이곳이 인산리 석실분의 묘역이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천장은 크고 납작한 판돌을 덮은 납작천장(평천장)이고, 동·서·북쪽의 벽면은 크기가 일정치 않은 자연석을 이용해 면을 맞추어 5∼7단 쌓아 올린 뒤 남벽은 크고 납작한 돌을 세워 입구를 막은 형태이다.

주변에 비슷한 흔적을 가진 석실 형태의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으나 매우 훼손되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Ο 강화능내리석실분(江華 陵內里 石室墳)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1번지

강화 능내리 석실분은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이다. 무덤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되었으며,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되었다.

복원전의 능내리 석실분 모습

출토유물로는 청자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편·구슬류, 상부원보(祥符元寶) 1점, 은제못, 금박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처리하여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하였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Ο 이건창 묘(李建昌 墓)

  • 지정호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55-27번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4년(고종 11)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었다. 그 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민생구휼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성품은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순절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문필은 송대(宋代)의 문장가인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인 김택영이 뽑은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에 포함 될 정도로 문장에 특출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 등이 있다.


Ο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114번길 6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이 살았던 집이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 년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이건창 생가 복원전 (1976년 강화사 자료)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대대적으로 보수·재정비하였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할아버지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공부를 하였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4(고종 11)에는 사신을 수행하며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었다.

그 후 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민생구휼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건물 바로 옆에는 이광명(李匡明), 이시원(李是遠) 등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Ο 강화 대산리고인돌(江華 大山里 고인돌)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대산리 1189-1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북방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남방식)으로 구분된다.

대산리 고인돌은 고려산의 동쪽 봉우리인 북산의 북쪽 능선의 맨 마지막 자락에 있다. 해발 약 20m 위치의 평평한 대지 위에 약간의 흙과 자갈을 돋우고 그 위에 고임돌이 무너진 상태에서 덮개돌이 내려앉아 있다.

고인돌무덤은 오른쪽의 크기가 길이 2.40m, 너비 1.50m, 높이 0.45m이다. 왼쪽의 크기는 길이 1.60m, 너비 1.30m, 높이 0.30m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3.68m, 너비 2.60m, 두께 0.50m이다. 덮개돌 밑으로 마감돌로 보이는 판석이 흙과 자갈에 묻혀 있다. 덮개돌의 석질은 흑운모편마암으로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Ο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江華 富近里 점골 고인돌)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743-6번지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이 고인돌은 강화읍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인화리 방면으로 가다 송해면과 하점면 경계지점을 지나 부근리-망월간 도로의 중간지점으로 고려산 북쪽에서 흘러내린 주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해발 15m 정도의 낮은 지대의 밭에 위치해 있다.

복원전의 점골 고인돌

고임돌이 기울어져 무너져 내린 것을 현재는 원형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동서방향의 고인돌을 바로 세우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북쪽 방향에는 마감돌이 유실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어 점골 고인돌은 물론 강화지역에 분포한 고인돌의 구조와 형태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고인돌 유적이다.

 

 


Ο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416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이다. 김상용(1561∼1637) 선생의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으로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 선생이 왕실의 종묘와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로 피난 온 이후 강화를 수비하던 지휘부의 안일한 전투 준비에 대한 지적과, 강화성이 청에 의해 함락되고 김상용 선생이 손자와 함께 남문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김상용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이 글을 짓고 김창집(金昌集)이 글씨를 써서 1700년(숙종 2)에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비문이 마모되어 1817년(순조 17)에 다시 세운 것이다. 구비와 신비의 내용은 차이가 없으나 후에 세운 비에는 새로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년도, 친자와 서자의 이름이 첨부되었다.

신비를 세우면서 구비는 땅에 묻었었는데, 1976년 신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던 중 파묻혔던 구비가 발견되어 두 비를 함께 세운 것이다.


Ο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2번지(전등사 내)

이 비는 양헌수 장군이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강화군민들이 1873년(고종 10)에 세운 것으로 정족산성 동문 가까이 있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양헌수(1816~1888)는 1848년(헌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5년(고종 2)에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탈환의 임무를 맡아 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임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기도 하다.

정족산성 전투 패배로 사기를 잃은 프랑스군은 곧바로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Ο 망양돈대(望洋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번지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망양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건평돈대·삼암돈대·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에 속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30m, 석벽의 높이는 300~340㎝이다. 동쪽으로 외포리 항이 있고 바로 아래 삼별초항몽유허비가 있다. 남쪽은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다


Ο 건평돈대(乾坪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 39번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 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망양돈대·삼암돈대·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 소속의 돈대로서 6조(六朝)에 올리는 조운의 감시소 역할과 국토방위의 임무를 겸하였다고 한다.
인근 마을에서는 ‘성아지돈대’라고도 부른다. 해안선이 돌출된 곳에 있어서 바다 쪽으로 시야가 잘 확보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방형 구조이나 서북쪽의 전면 석축이 약간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외압을 잘 견디게 하는 구조적인 안정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둘레가 121m 규모이다.
1679년(숙종 5)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를 받아 이 돈대를 설치했다.

건평돈대에서는 2017년 4월15일 돈대를 복원하던 중 330년 전 불랑기 모포(母砲) 1문이 출토되었다.  강화도를 톱니바퀴 같이 돈대를 세우고 돈대에는 유사시 적을 방어하기 위해 2~4개의 포좌를 설치하고 불랑기를 배치한 것으로 기록에 전하는데 건평돈대에서 실체가 출토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불랑기는 2009년 서울시 신청사부지(군기시 터)에서 출토된 불랑기 자포(子砲) 1점을 제외하고 출토지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건평돈대 출토 불랑기는 실전배치 장소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역사적으로 의미가 높다.

또한 포신의 명문을 통해 1680년(숙종 6)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고 제조 관청도 확인되어 조선시대 무기사와 국방 체계를 연구하는데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Ο 굴암돈대(屈岩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487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굴암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하일돈대’로 불린다.

다른 돈대들이 진이나 보에 속했던 것과 달리 굴암돈대는 진무영에서 직접 관리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반원형 구조로 둘레가 115m이고, 석벽의 높이는 130~460㎝이다.


Ο 미루지 돈대(彌樓只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 170-2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미루지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축조 당시의 이름은 미곶돈대이다. 마을 이름이 미루지인데, 동네 지형이 바다 쪽을 바라보면 다락방에 앉은 모양 같다고 해서 미루지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북일곶돈대·장곶돈대·검암돈대와 함께 장곶보에 속했다.

원형 구조로 둘레가 116m, 석벽의 높이는 120~230㎝이다. 다른 돈대와 달리 출입문이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돼 있다.


Ο 북일곶돈대(北一串墩臺)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산361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북일곶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미루지돈대·장곶돈대·검암돈대와 함께 장곶보에 속했다. 방형 구조로 둘레 122m, 석벽 높이는 130~350㎝이다.

시야 각이 매우 넓어 경계 초소로서 탁월한 위치이다. 한편 북일곶돈대 안쪽으로 건물지가 확인됐다.


Ο 용진진(龍津鎭)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215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진보의 설치는 효종 대에 시작되었다. 봉림대군 시절 강화에서 직접 병자호란을 겪었던 효종은 보장처로서의 강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진보 설치에 적극성을 보여 8개의 진보를 세웠다. 용진진은 1656년(효종 7)에 설치됐다.

각 진보에는 첨사(종3품)나 만호(종4품)나 별장(종9품)이 지휘자로 파견되어 해당 병력을 통솔했다. 용진진은 만호가 책임자로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를 관할했다.

문루는 참경루(斬鯨樓)인데 홍예 부분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고 좌강돈대도 새로 쌓았다. 좌강돈대는 용진돈대라고도 불린다.


Ο 강화 부근리고인돌 군(江華 富近里 고인돌群)

  • 지정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부근리 고인돌군은 사적 제137호로 지정된 강화부근리 지석묘 주변, 해발 50m 내외의 낮은 구릉과 평지에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었으나 2기가 훼손되어 없어지고 현재 14기만 남아있다. 평지에는 사적 제 137호인 강화부근리 지석묘와 탁자식 고인돌의 고임돌로 추정되는 석재 하나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솔밭에 덮개돌 밑에 고임돌이 없는 고인돌인 개석식 고인돌 3기가 축조되어 있으며, 사적 제 137호의 동쪽 낮은 구릉에는 탁자식 4기와 개석식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다.


Ο 강화 삼거리고인돌 군(江華 三巨里 고인돌群)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산 118 외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 하점면 삼거리 고인돌군은 강화읍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인화리 방면으로 가다 송해면과 하점면 경계지점을 지나 부근리-망월간 도로의 중간지점인 진촌마을에 있다.

강화 삼거리 고인돌 군 채석장

진촌마을은 고려산 북서쪽 능선 상에 위치한 마을로 이 지역 일대에 탁자식 고인돌 9기가 일렬로 분포되어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은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패여 있는데 이러한 모양을 남한에서는 성혈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자리와 연관 짓고 있다.

작은 구멍이 있는 고인돌무덤의 크기는 고임돌의 높이 2.80m, 너비 0.90m, 두께 0.38m이다. 고인돌무덤 가까이에는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석장이 있다.


Ο 강화 고천리고인돌 군(江華 古川里 고인돌群)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18번길 96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고천리 고인돌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고려산의 서쪽 능선을 따라 해발 350∼250m 지점에 약1.5km 거리를 두고 3개 군락으로 나누어 총 20기의 고인돌무덤이 흩어져 있다(문화재청 자료에는 18기로 되어있으나 실제 20기가 맞음). 이 고인돌군은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이 분포하는 평균 고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의 채석장

대부분의 고인돌무덤들은 무너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 중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탁자식 고인돌무덤은 덮개돌의 크기가 가로 3.35m, 세로 2.47m, 두께 0.65m이다. 고인돌군이 위치한 주변 지역에 고인돌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다.

 

 


Ο 강화 오상리고인돌 군(江華 鰲上里 고인돌群)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124 외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오상리 고인돌은 1972년에 1기가 알려져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그 이후에 자세한 보고는 없다가 1990년대 초에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조사연구』를 통해 이 고인돌이 있는 오상리 산125번지 일대를 자세하게 조사하여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사이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을 더 찾아냈다. 현재 총 12기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덮개돌은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板石形)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길이 335㎝로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가 130∼260㎝로 다양한 편이다.

돌방(石室)은 돌널형태의 모습이고,  고임돌이나 막음돌을 세울 때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주변에 쐐기돌을 사용하였다. 돌방의 바닥은 거의 대부분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1·4·9호 고인돌은 판돌이나 깬돌[할석]이 깔려 있었다.


Ο 강화 교산리고인돌 군(江華 橋山里 고인돌群)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사면 교산1리 일원 산108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교산리고인돌군은 별립산 북쪽 구릉에 3개의 군락을 이루어 총 13기의 고인돌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무덤은 굄돌과 덮개돌의 일부만 훼손되었을 뿐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교산리 고인돌 군 채석장

굄돌과 마감돌 및 덮개돌을 갖춘 탁자식 고인돌무덤이 있으며 간혹 크기가 3∼4m나 되는 덮개돌을 갖춘 바둑판식 계통의 고인돌무덤도 있는데 이들은 굄돌 없이 땅위에 덮개돌만 놓은 이른바 개석식 고인돌무덤이다.

고인돌 2군 옆에 채석장으로 추정되는 바위가 있다.

 


Ο 강화통제영학당지(江華統制營學堂址)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61번지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말해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총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을 겪은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면서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립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다. 5월에 갑곶나루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영국 해군 대위 콜웰과 하사관 커티스가 교관으로 부임하여 교육하였으나 이듬해 발발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의 영향으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1894년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에 통제영학당지가 있다.


Ο 정제두 묘(鄭齊斗 墓)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65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이다.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24세에 과거 공부를 그만 두고 양명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61세에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하곡(霞谷)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아들 후일(厚一)을 비롯하여 이광명(李匡明), 신대우(申大羽), 심육(沈?),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이 그의 문인으로 학풍을 이었다. 그가 속한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강화학파라 불리게 되었다. 양명학을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는 정제두를 시작으로 한말 이건창, 이건승을 이어 박은식과 정인보에게로 그 학통이 계승되었다.

묘역 인근에 설립한 정제두 숭모비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62-5 길 바로 옆에 있다. 아버지 상징 묘역 바로 뒤편 위에 있다. 묘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사성이 없이 용미만이 길게 되어 있고, 그 앞에 원형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하계부분에는 좌우에 민무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관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Ο 강화 망산봉수(江華 望山烽燧)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131

봉수(烽燧)는 횃불인 봉(烽)과 연기인 수(燧)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통신 방법으로 조선시대까지 쓰였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냈다.

대개 봉수는 해발 100m~300m의 너무 높지 않은 산 정상부, 주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됐다. 망산봉수는 덕산봉수라고도 불린다. 덕산은 해발 240m이다. 조선 초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별립산 봉수로 전달했고, 조선 후기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교동 화개산 봉수로 전했다.

망산봉수 연조 터

망산봉수는 사방 8.3m 내외의 정방형 기단에 원형 연대를 갖추고 있었다. 동쪽 기단은 단수가 2단이며 높이가 0.8m이다. 서쪽 기단은 단수가 4단이며 높이가 1.3m이다. 남쪽 기단은 단수가 5단이며 높이가 1m이다. 북쪽 기단은 거의 붕괴됐는데 높이가 0.4m이다. 연대는 지름이 4.5m이고 높이가 3.4m이다.

 

 


Ο 황형 묘(黃衡 墓)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72-1

황형(1459∼1520)은 조선 성종, 중종 때의 무신, 명장 황형 장군의 묘이다. 황형 장군(1459∼1520)은 1480년(성종 11)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중종 때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황형장군의 사당 장무사

그 뒤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묘역은 강화읍 월곶리 야산에 있다. 묘역은 상계와 하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계에는 곡장이 없이 원형 봉분이 조성되어 있고 부부의 묘가 좌·위에 있는 쌍분이다.

봉분 우측에 화강암으로 만든 묘표가 있은데 장방형 대석에 화관석 비두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팔작지붕 형태의 장명등, 한 쌍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오른편 산 아래에는 신도비와 황형장군의 위패를 모신 장무사(莊武祠)가 있다.


Ο 강화 정족산 사고지(鼎足山 史庫)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44(전등사 내)

정족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각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후기 사고 중 하나이다. 실록은 조선전기에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1606년에 다시 만들어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강화마니산, 오대산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춘추관본이 불타 없어졌고 그후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보관하게 되었다. 정족산 사고는 1653년(효종 4)마니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다.

1660년현종 1에 강화유수 유심柳淰, 1608~1667 이 사찰 서쪽에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각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각을 짓고, 1678년숙종 4에 675궤(匱: 상자)를 보관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조선 왕실과 관련된 기록을 보관해왔으며, 영조는 선원각과 사각에 현판을 내리고, 실록을 임시로 보관하는 사고의 별관인 취향당(翠香堂)현판을 직접 친필로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정족산 사고에 있던 조선 왕실 기록은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졌다. 1930년에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는데, 광복이 되면서 학교 명칭이 서울대학교로 바뀜에 따라 현재는 서울대학교에서 정족산 사고의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다. 원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1999년에 복원했다.


Ο 강화 정족산성 진지(江華 鼎足山城陣址)

  • 지정 : 기념물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44(전등사 내)

정족산성진은 정족산 사고를 수호할 목적으로 조선중기 이후 설치된 국방시설이다. 1907년 방화로 전체 소실되어 평탄지로 있던 곳을 2008년 발굴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 대규모 유구가 발굴되었다.

1870년대 이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족산성진」 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내사, 진사, 포량고 등의 건물지와 담장시설, 문지 등을 대부분 확인하였다. 발굴된 일부 건물지의 경우 정족산성진 설치 이전인 1784년(정조 8년)에 건립된 정족창과 관련된 건물지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강화군  사진: 강화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