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26개)

Ο 용흥궁(龍興宮)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이고,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이다. 1844년(헌종 10) 회평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살았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 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용흥궁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Ο 충렬사(忠烈祠)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충렬사로 232(선행리)


    충렬사는 김상용 선생을 비롯한 병자호란과 신미양요 때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충신 28명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1641년(인조 19)에 건립하여 현충사(顯忠祠)라 부르다가 1658년(효종 9)에 국왕으로부터 충렬사란 이름을 받아 강화유수 허휘가 충렬사로 이름을 바꿨다.

    김상용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실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 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충렬사를 건립할 당시에는 모두 7명을 배향 하였으나, 이후 황선신과 강흥업이 추향되어 9명의 위패가 모셔졌고 그 후 충렬사 비기가 건립되었다.

    이후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맞서 싸운 충신까지 배향하여 현재 모두 2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충렬사는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현존 건물로는 한식목조 맞배지붕으로 된 14평의 사당(祠堂)과, 16평의 수직방(守直房), 14평의 전사청(典祀廳), 비각(碑閣),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으며, 1977년에 보수 정화하여 현재에 이른 것이다.


Ο 연미정(燕尾亭)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강화도 동북단에 이르러 서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했다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도 한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지만 1그루는 2019년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쓰러졌다.

      이곳은 과거에 민간인통제구역이어서 일반인의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2008년 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현재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탐방하고 있다.


Ο 강화유수부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조선시대의 강화유수가 집무를 보던 관아이다.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관리인 수령이 집무를 하던 관아 건물을 동헌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강화에는 개성, 수원, 광주와 함께 특별행정구역인 유수부를 설치하였고 종2품 당상관인 유수를 파견하였는데, 유수가 집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 강화유수부동헌이다.

    이 유수부동헌이 위치한 곳은 원래 고려 고종 때에 임시 수도로 궁궐이 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 강화의 행정관서가 자리를 잡았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다.

    조선 1638년(인조 16)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백하 윤순의 필적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에 1칸은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개, 보수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Ο 강화유수부이방청(江華留守府 吏房廳)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조선시대의 강화의 지방 행정 관아로 수령을 보좌하던 행정 실무자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조직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도 내의 지방관을 지휘·감독하도록 하였으며, 관찰사가 상주하며 근무하던 곳을 감영이라 한다.

    각 도 예하에는 부·목·군·현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하였는데 이곳에 근무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를 수령이라 하였으며, 그들이 집무를 하던 관아 건물을 일반적으로 동헌이라 하였다.

    동헌에 근무하는 지방관을 보좌하여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이방·호방 등 하급 관리를 향리라 하는데 이들의 집무공간 중의 하나가 이방청이다.

    이 건물은 한식 목조 단층기와집으로 ㄷ자형인데, 온돌방이 8칸이고 우물마루로 된 청마루가 12칸이며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이다. 팔작지붕에 민도리 홑처마로 건평은 220㎡쯤 된다.

    지금의 건물은 1654년(효종 5)에 유수 정세규가 건립한 것이다. 1783년(정조 7)에 중수 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개수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Ο 보문사 석실(普門寺 石室)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 828번길 44 (매음리


    보문사에 있는 석굴사원으로, 나한상을 모시는 나한전의 구실을 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문을 만들고, 그 안에 감실을 마련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 ·제화갈라보살, 나한상 등을 모셔두었다.

    보문사는 신라 635년(선덕여왕 4)에 회정대사가 창건 하였다고 전하여 오는데, 조선 1812년(순조 12)에 중건하였고, 그후 몇 차례 중수 하였다고 한다. 이곳 나한전에 모신 보문사는 경남 남해 보리암,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이 석불들은 신라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현몽대로 안치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Ο 교동향교(喬桐鄕校)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읍내리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지방 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실시와 학교 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설치되기 시작한 향교는 조선시대 유교 이념의 보급과 중앙 집권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확대 설치되었다.

    교육기관이자 교화의 중심지로 시작된 향교는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과 향촌사회의 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향촌 사회 권력 변동의 중심에서 신분 상승과 부역을 회피하는 통로로, 양반 신분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지방의 각 군현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 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Ο 보문사 마애석불좌상(普門寺 磨崖石佛坐像)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828번길 44 (매음리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인 이화응과 1928년 낙가산 중턱 일명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한 석불좌상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머리에는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네모진 모습이다. 얼굴에 비해 코는 넓고 높으며, 귀는 투박하고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다.

    옷은 각이 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큼직한 卍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손에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을 들고 연꽃무늬 대좌위에 앉아 있으며, 불신 뒤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있다.

    이 불상은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성지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 석불에서 기도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Ο 강화석수문(江華石水門)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883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한 강화산성의 수문 두 개 가운데 하나로 상수문(上水門)이다. 지금 강화읍의 중심인 강화대로는 동락천을 덮고 그 위에 조성한 도로이다.

    1709년(숙종 35)~1711년(숙종 37)에 강화산성을 쌓을 때 세워졌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전체 길이 18.2m이고 높이는 2.7m, 너비는 4.7m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3개 있다.

    1910년까지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하다가 1977년 하수문(下水門) 자리로 옮겼던 것을 1993년에 원래의 상수문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1998년 8월, 집중호우로 석수문 석축 일부가 무너져 정비하였다.

    강화산성 서문 옆에 있다. 한편 하수문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1875년(고종 12) 강화도조약 체결을 위해 강화에 들어온 일본인이 찍은 사진을 통해 당시 하수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상수문처럼 무지개 모양의 홍예가 3개이다.


Ο 후애돈대(後崖墩臺)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번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 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밖은 성곽으로 높게 쌓고 그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후애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았다. 강화 54돈대 중의 하나인 이 돈대는 화강암을 이용해 정사각형 모양으로 쌓아 올렸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4개 설치했다.

    돈대 주변 마을에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이 때문에 돈대를 신성하게 여기고 보호하여 본디 모습이 잘 남아있는 편이었다.

    1998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둘레가 129m이고, 석벽의 높이는 280㎝~500㎝이다. 택지돈대, 동검북돈대와 함께 선두보에 소속됐다.


Ο 강화향교(江華鄕校)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향교길 58 (관청리)

    강화향교는 고려 1127년(인종 5) 내가면 고천리(고읍)에서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1232년(고종 19) 강화읍 갑곶리(먹절)로 옮겼다가 1259년(고종 46) 서도면 볼음도로 옮겼고, 조선 1642년(인조 2)에는 유수 심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옮겼다.

    1627년(인조 7)에는 유수 이안눌이 대성전에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 유수 민시중이 남문 근처로 이건 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66년에 유수 이은이 중수함과 동시에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현재 강화 향교의 건축물은 대성전, 동무와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전은 여러 성현의 위패를 배향하였고, 봄과 가을에 제사(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하는 건축물이다. 명륜당은 향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이다.

    2016년 대대적인 보수를 완료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Ο 삼암돈대(三岩墩臺)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223-4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1679년(숙종 5)에 병조판서 김석주와 강화유수 윤이제의 주도로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건평돈대·망양돈대·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의 지휘를 받았다. 삼암돈대는 전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후면은 나지막한 산이다.

    석누조가 설치돼 있는데, 이는 토축에 스며드는 물을 배수 시켜 토압을 완화하는 역학을 하였다. 석누조는 건평돈대와 굴암돈대에서도 볼 수 있다.

    원형 구조로 둘레가 121m이고 석벽의 높이는 190~400㎝이다. 포를 설치했던 포좌가 4개 있다. 석모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Ο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 지정호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 185-1번지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 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 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6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분오리돈대는 1679년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동막해수욕장 옆에 있다. 원래 계획은 방형 구조였는데 자연 지형을 이용해 쌓다 보니 초승달 모양이 되었다.

    돈대가 대부분 방형이거나 원형이라서 초승달 닮은 분오리돈대의 개성이 도드라진다. 둘레가 113m이고 석벽의 높이는 160~440㎝이다. 1994년에 복원됐다.

    다른 돈대들이 진이나 보에 속했던 것과 달리 분오리돈대는 진무영에서 직접 관리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조망 범위가 매우 넓다.


Ο 적석사사적비(積石寺史蹟碑)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 181 (고천리


    적석사는 『전등사본말사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백련사 및 청련사 등과 함께 고구려 416년(장수왕 4)에 창건되었고, 처음에는 적련사(赤蓮寺)였다고 전하고 있다.

    적석사를 오르는 길목 오른쪽에 자리한 적석사 사적비는 조선 1714년(숙종 40)에 세워진 것으로 전체 높이가 3m94cm이고 비신의 높이 3m4cm, 너비 69cm이다. 사적비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지붕모양의 뚜껑돌이 얹혀 있으며 비신의 상부에 ‘고려산적석사지비(高麗山積石寺之碑)’라는 비의 제목이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백하 윤순이다. 비문에는 사찰의 중건·중수상황과 고려시대 몽골침입에 대항하여 강화에 도읍을 옮겨 왔을 때의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Ο 강화 온수리성공회 사제관(江華 온수리 聖公會 司祭館)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온수리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은 이 성당 신부들의 생활 공간이다. 이 사제관은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 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를 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초기 선교 당시의 소박하고 순수한 토착미를 엿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 그대로 살아 있다.

    사제관은 성당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원래 ‘一’자형의 대문과 ‘ㄷ’자형의 안채 공간이 종으로 배치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이 없어지고 그 흔적으로 계단과 주초 자리만 남아 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고요한이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 였다.

    이 사제관은 외국인이 한국 전통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 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 또 건축 수법이나 치목 형식에서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주문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여 기술적인 적용을 하였는 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Ο 전등사약사전현왕탱(傳燈寺藥師殿現王幀)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전등사


    전등사 약사전에 보존되어 있는 현왕탱인데, 이 그림은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도상화한 것이다.

    조선 1884년(고종 21)에 제작된 그림으로 화면은 원형구도로서 생동감을 주고 있으며 비록 색 배합은 뛰어나지 않지만 꼼꼼한 필력이 구사된 점, 현왕도의 도상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점 등 19세기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Ο 전등사청동수조(傳燈寺靑銅水槽)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전등사


    청동으로 제작된 이 수조는 바리형태를 띠고 있고, 구연부에는 덧띠를 두르고 있으며 약간의 균열과 파손 흔적이 보이지만 모두 수리하여 양호한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수조는 삼국시대부터 큰 돌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기 시작하였으며 우물가에 두고 그릇 등을 씻을 때 사용하였다. 수조는 궁궐에서는 드무라 부르는데 솥같이 생긴 그 안에 물을 채워 화재가 날 경우 바로 사용할 수 있고, 공중에 떠다니는 화마나 불귀신이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다른 귀신이 이미 와 있다고 착각하게 해서, 다른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설치한다는 설화가 있다.

    현재까지 명문이나 청동수조 제작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없지만 고려 말 내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청동수조의 용도나, 재질과 규모 및 제련과 제조 기술에 대한 제반 여건을 가정할 때 혼란기의 여말선초 시기로 비정하기 보다는 좀 더 난숙한 귀족문화가 꽃을 피우던 고려 중기로 시대를 소급해 보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유물의 사례 연구를 통하여 정확한 주조 시대와 용도를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Ο 전등사업경대(傳燈寺業鏡臺)

  • 지정 : 유형문화재
  • 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전등사

    업경(業鏡)은 죽은 이가 일생 동안 지은 선악업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는 거울인데 거울을 받치는 틀까지를 합쳐서 업경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업경의 다른 말로는 업경륜, 혹은 정파리경이라고도 하는데, 1년에 3번 정월, 5월, 9월에 세상을 비추는데 망인의 선악이 있는 그대로 모두 나타난다고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황색사자와 청색사자 1쌍으로 목각 사자의 몸체와 등 위에 커다란 화염문 거울이 꽂혀 있다. 규모는 높이 107cm, 길이 65cm이다. 좌대 바닥에 ‘천계칠년정묘구월십삼일 각록목화원밀영·천기 봉생(天啓七年丁卯九月十三日 刻祿木畵員密英 天琦 奉生)’이라는 묵서 명문이 남아 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업경대는 주로 시왕이 있는 지장전이나 명부전에 한 쌍으로 봉안되며, 승려에게는 엄격한 수도생활을 강조하고 중생에게는 죄업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의 편년 설정과 상호비교 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

Ο 전등사수미단(傳燈寺須彌壇)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전등사 내)


    전등사 대웅전의 본존불을 받치는 목조 받침단으로 일종의 대좌와 같은 형식인데, 대웅전 내의 닫집과 더불어 장엄한 불교 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전등사 수미단은 가로 480㎝, 세로 118㎝, 폭 200㎝로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맨 하단 받침부 몰딩 사이에 불법 수호신 격인 도깨비와 같은 문양이 익살스럽게 조각 되어 있고, 중간 부분 장판에는 꽃·나무·새·당초문·보상화 등과 같은 꽃 문양과 상상의 동물과 귀면 등이 다양하게 투각 되어 있다.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조각 기법과 함께 같은 동물의 경우에도 형상과 얼굴 표정을 모두 달리하여 표현한 장인 의식은 조선 후기 목조 공예의 높은 수준을 유감 없이 드러낸 걸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높으며 주목 받고 있다.


Ο 강화 온수리성공회 성당(江華溫水里聖公會聖堂)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온수리

    이 성공회성당은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가 지은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대한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 때 분리된 영국성공회의 한국교구로, 예배와 풍습은 가톨릭과 다르나 교리와 관행은 가톨릭적인 교회이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대한성공회에서는 강화성공회 성당을 먼저 건립하였고, 이어 온수리 성공회성당이 건립되었다.

    온수리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9칸의 팔작집이다.

    지붕의 정면과 후면의 합각부 위, 용마루 양끝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어서, 이곳이 전통 양식의 건물 구조를 한 기독교 계열의 건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내부에는 전면에 내진을 설치하여 예배의 집례 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앞으로는 의자를 내어 신도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내부의 중앙에는 모두 14개의 방형 고주를 설치하여 지붕의 하중을 분산 시키고 있다. 성당 건물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 삼문 형식의 종루가 있는데, 원래의 정문으로 생각된다. 종루의 양쪽 칸에는 조그마한 공간을 두어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앙 칸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층은 문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지만 문을 달지는 않았다.

    상층은 종루로서 서양식 종이 걸려있으며 줄이 아래층으로 드리어 있어서 종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당의 앞쪽으로 3기의 비석이 있는데, 1기는 터너의 기념비이고 나머지 2기는 모두 조마가 주교의 영세 기념비이다.


Ο 청련사큰법당삼장탱(靑蓮寺 큰法堂 三藏幀)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고비고개로188번길 112 (국화리, 청련사


    청련사 큰법당의 삼장탱화는 상하 2단으로 크게 구분하고 상단에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권속들로 가득 메우고 있다.

    하단에는 이들 보살의 협시와 권속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삼장보살은 하나의 방형 수미단 위에 중앙 천장보살의 신광만 바탕을 금니로 처리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이중륜광의 두·신광을 갖추고 결가부좌 하였다.

    중앙의 천장보살은 화려한 보관과 붉은색 상의, 백색의 치레가 있는 군의를 입고 손에는 녹색의 격자문이 있는 경책을 잡고 있으며, 좌측의 지지보살은 화려한 관과 붉은 상의를 입고 왼손으로 백색의 경책을 잡았으며, 오른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우측의 지장보살은 이들과 달리 민머리로 표현되었으며 상하 구분없이 적색 가사를 입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보주를 잡고 있다. 하단에는 삼장보살들의 협시들이 일렬로 표현되고 있는데, 천장보살의 협시인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이 화려한 관을 쓰고 합장을 하고 있으며,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 앞쪽에는 정병과 과일을 받쳐 들고 공양하는 천녀가 표현되었다.

    좌측에는 사자관을 쓰고 장검을 잡고 있는 요수보살과 높고 화려한 관을 쓰고 장검을 치켜든 타라니보살이 지지보살을 협시하고 있다. 우측에는 지장보살의 협시인 승현의 도명존자와 성군형인 무독귀왕이 합장을 하고 서 있다.

    채색은  주로 적색과 청색, 백색, 황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금니를 사용하였는데, 천장·지지·지장보살상의 몸색은 황색을 사용하였고 나머지 인물들은 백색으로 처리하였다. 제작연대는 1881년(고종 18)이다. 조선 후기 제작연대가 확실한 삼장탱으로 경기ㆍ강화 지역의 탱화 조성 화법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Ο 청련사큰법당현왕탱(靑蓮寺 큰法堂 現王幀)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고비고개로188번길 112

    청련사 큰법당의 현왕탱은 병풍처럼 생긴 'ㄷ'자형 황색 벽을 배경으로 중앙 의자에 앉은 현왕을 중심으로 성왕, 판관, 녹사, 동자, 동녀 등 현왕의 권속들이 에워싼 형식이다.

    그림의 주제인 현왕은 머리 위에 경책을 얹은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뭔가를 가리키고 있으며, 머리에는 녹색의 두광이 표현되었다. 좌·우측에서 성왕이 협시하고 있으며 아래편에는 경권과 경책을 가지고 있는 판관, 기록을 하고 있는 녹사, 사자, 동자, 동녀가 표현되었다. 현왕이 앉아 있는 의자 뒤편으로 조그맣게 묘사된 인물들이 번과 부채, 삼지창 등을 들고 현왕을 시위하고 있다.

    인물의 복장에는 주로 적색과 청색을 사용하였고 이외에 황색, 백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제작 연대는 고종 18년(1881)이며, 그림의 크기는 가로 104.5cm, 세로 156cm이다. 조선 후기 제작 연대가 확실한 현왕탱으로 경기·강화 지역의 탱화 조성 화법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Ο 청련사원통암감로왕탱(靑蓮寺圓通庵甘露王幀)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고비고개로188번길 112 (국화리, 청련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청련사 원통암의 1916년에 조성된 감로탱이다. 감로탱은 망인의 천도를 위해 우란분경(盂蘭盆經)의 내용을 도상화한 그림이다.

    화면 가운데 커다란 상에 성반(盛飯)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는 광경을 중심으로 위에는 7불이 나란히 서 있고 좌측편에는 아미타삼존불이 우측편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이 묘사되어 있다.

    성반 아래에는 두 마리 굶주린 아귀가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로 지옥과 현세의 여러 생활상들을 묘사하고 있다. 감로탱의 크기는 가로 166.5cm, 세로 146cm이다. 1916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반적으로 색이 둔탁하다.


Ο 전등사약사전석불좌상(傳燈寺藥師殿石佛坐像)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전등사

    전등사 약사전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석불좌상이다.

    전방을 향한 얼굴에 눈을 약간 아래로 내려 뜬 단아한 얼굴과 목은 정확한 삼도가 있어 길어 보이고, 벌어진 어깨선은 자연스러워 보이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선정인을 하였다. 그리고 약합을 들고 있어 전형적인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통견의 두꺼운 가사는 길상좌를 취한 무릎 아래까지 자연스럽게 내려졌으며 옷주름은 훤칠한 자세에 비해 약간은 형식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부피감이 결여되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두꺼운 칠과 금분을 정밀하지 못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전등사석불좌상은 고려 말 조선초에 제작된 것으로 신체비례로 보아 갸름한 체구에 단아한 얼굴형을 하고 있어 고려 불상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Ο 강화 고대섭 가옥(江華 高大燮 家屋)

  • 지정 : 유형문화재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강화대로674번길 23-4 (솔정리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이 도입된 99칸 민가주택으로 1941년 건축 되었으며 면적은 322.62㎡이다.

    정면과 좌우측 3면에 문을 낸 “ㅁ”자형 반가형 주택으로 규모가 매우 큰 민가이다. 사괴석으로 담장을 두르고, 정문은 한 칸 소슬대문이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트인 곳으로 중정을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다. 또한 반루 기둥 위에 겹처마를 사용하였고, 행랑채 끝에는 다실을 두어 일본식 구조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건물 내부에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복도를 각각 별도로 마련해 놓았다.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2006년 5월 15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