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서 출토된 국보들

 

Ο 청자 진사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靑磁辰砂蓮花文瓢形注子)

 [ 국보 ]

고려 중기에 만든 청자 주전자로 높이 33.2㎝, 밑지름 11.4㎝으로 이 작품은 인천시 강화 최항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 작품으로 추정된다.

표주박 모양의 몸통에 표면은 연잎으로 둘러싼 형태이다. 꽃봉오리 모양의 마개를 하고 있으며, 잘록한 목 부분에는 동자가 연봉오리를 두 손으로 껴안아 들고 있는 모습과 연잎으로 장식하였다. 손잡이는 덩굴을 살짝 구부려 붙인 모양으로 위에 개구리 한 마리를 앉혀 놓았다. 물이 나오는 아가리는 연잎을 말아 붙인 모양이다.

고려청자에 붉은 색을 띠는 진사를 곁들이는 장식 기법은 12세기 전반에도 있었으나, 진사로 무늬를 대담하게 장식한 작품은 13세기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여겨진다. 연잎 가장자리와 잎맥을 진사로 장식하고 진사의 빛깔이 뛰어나 고려청자 역사상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보관중이다.


Ο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靑磁 象嵌雲鶴文 梅甁)

   [ 국보 ]

양도면 능내리 284-1번지에서 1966년 출토된 청자상감국화문매병은 높이는 30.7cm이며, 입지름은 15.5cm, 굽지름은 10.9cm이다. 지름이 작고 직립된 입술부에서 급격히 팽창하여 어깨부가 풍만하다. 부드럽게 S자 곡선을 그리며 아래 부분이 좁아져 굽에 이른다.

무늬는 간결하면서도 활달한 필치로 시문하였는데 어깨부는 4곳에 같은 간격으로 흑백상감의 국화문을 시문하였다. 몸체부에는 주문양인 흑백상감의 국화절지문(菊花折枝文)을 시문하였는데, 역시 같은 간격으로 3곳에 배치하였다.

아래 부분에는 백상감 뇌문대(雷文帶)를 돌렸다. 그릇 겉면이 고르지 못하며, 빙렬이 있다. 굽은 안바닥을 얕게 깎았낸 속굽형이다. 굽바닥과 굽안바닥에 굵은 모래 섞인 내화토 빚음을 받쳐 번조하였다.

양도면 능내리 284-1번지에서 1966년 출토되었는데 능내리에는 원종비 순경태후(順敬太后) 가릉(사적 370호)과 능내리석실분(인천시 기념물 제28호) 등이 있어 고분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Ο 청자 퇴화점문 나한좌상 (靑磁 堆花點文 羅漢坐像)

   [ 국보 ]

1950년대 강화도 국화리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에 여섯조각으로 부서져 있던 것을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바위 모양의 대좌(臺座) 위에 팔짱을 낀 채 작은 책상에 의지하여 오른쪽 무릎을 반쯤 일으켜 세우고 앉아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다. 눈은 반쯤 뜨고 있는데, 눈썹과 눈이 수려하고 코는 오똑하다. 머리와 옷주름 일부, 눈썹, 눈동자, 바위 대좌 등에는 철분이 함유된 검은색 안료를 군데군데 칠하였으며, 옷의 주름가에는 백토를 사용하여 도드라진 점을 찍었다.

이 작품은 사색하듯 숙연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와 책상, 바위 대좌의 처리 등에서 고려시대 공예조각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이라고 할 만하다.


Ο 조선왕조실록 낙질 및 산엽본 (朝鮮王朝實錄 落帙 및 散葉本)

[ 국보 ]

강화 정족산 사고에 보관되어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시대의 정치ㆍ문화․사회ㆍ외교ㆍ경제ㆍ군사ㆍ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망라되어 있으며, 국왕도 마음대로 열람하지 못했을 정도로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은 사료이다.

강화사고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653년(효종 4)에도 화재로 일부 서적이 소실되었고, 1665년(현종 6)에 손상된 사고 건물을 보수하였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실록을 비롯한 강화사고 소장 서적들을 정족산사고로 이관하였다.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이관, 규장각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받다가, 1928~1930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정족산사고본 실록을 관리했으며, 199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면서 규장각이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소장, 관리 책임을 맡게 되었다.

< 출처 : 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