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정려

정려문(旌閭門)

정려문은 원래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의 문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문을 말한다. 흔히 작설(綽楔), 홍문(紅門), 생정문(生旌門)이라고도 한다. 붉은 색으로 단장하며 편액에는 충·효·열·직함·성명 등을 새겨넣어 정려문의 주인공의 훈적(勳績)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조정에서는 매년 연초에 조사하여 왕에게 알리고 정려문을 세워주는 한편 복호의 혜택을 주고 쌀과 의복을 주는 등 특전을 베풀었다. 강화군에는 그 역사가 다난했던 만큼 충신과 효자, 효부, 열녀 등의 정려문이 많이 내려졌다

Ο 황선신 정문(黃善身 旌門)

소재지 : 강화읍 대산리 산126-2번지

조선중기 무신인 황선신(1570∼1637)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사수(士修)이다. 1597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637년 1월 청나라 군사가 강화를 공격하자, 강화부중군의 직책으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충청수사 강진혼(姜晉昕)·천총 구원일(具元一) 등과 함께 강화의 연미정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갑곶진에서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특히 1792년에 충렬을 기려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忠臣御侮將軍訓鍊院正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使黃善身之門
崇禎紀元後四回甲一丑三月日 改建


문응규 정문(文應奎 旌門)

소재지 : 양사면 인화리 384번지

문응규는 조선 인조대 이관의 난 등 여러 변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무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 하였다.  1885년 정문이 내려졌으며, 본래 충남 홍성군 운산에 세워졌다가 1895년 양사면 인화리 송산묘하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문응규 사당은 1칸의 정방형 건물로 정면은 홍살로 막았다. 문응규 정려는 이 안에 있으며, 현재는 문응규의 16세손 문원영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인조가 하사 하였다는 사인검을 소장하고 있다.

旌閭忠臣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行通政大夫竹山府使兼營長
一等寧社員原從功臣文應奎之門 上之十二年 五月日


Ο 황경례 충신정려(黃景禮 旌閭)

소재지 : 교동면 양갑리 236-2번지

강화 양갑리 황경례 충신정려는 이괄의 난 당시 반란군에게 잡혔으나, 굴하지 않고 순절한 황경례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문이다. 그의 후손 양신이 왕에게 진언하여 정문을 하사받았다. 정려는 근세에 지은 시멘트 블록건물 내에 모셔져 있다. 정려의 전면에는 1989년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 남아있다.

忠臣保功將軍武臣兼宣傳官贈兵曹參議黃景禮之門 上之十二年十一月日 命旌閭


Ο 차명세 충신정려

강화군 내가면 황청포구로 69번길 36-11

차명세는 황선신, 강흥업, 안몽상 등과 함께 병자호란 당시 갑곶진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 인물이다. 현판은 정면, 측면 각각 1칸씩으로 된 벽돌조 보호각 안에 있으며, 후손에 의해 매해 제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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