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효부정려

정려문(旌閭門)

정려문은 원래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의 문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문을 말한다. 흔히 작설(綽楔), 홍문(紅門), 생정문(生旌門)이라고도 한다. 붉은 색으로 단장하며 편액에는 충·효·열·직함·성명 등을 새겨넣어 정려문의 주인공의 훈적(勳績)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조정에서는 매년 연초에 조사하여 왕에게 알리고 정려문을 세워주는 한편 복호의 혜택을 주고 쌀과 의복을 주는 등 특전을 베풀었다. 강화군에는 그 역사가 다난했던 만큼 충신과 효자, 효부, 열녀 등의 정려문이 많이 내려졌다.

Ο 한산 이씨 효자문(韓山 李氏 孝子門)

소재지 : 하점면 삼거리 894번지

이면항(李勉恒)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돈독하여 1675년 효자문이 내려졌고, 1888년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를 제수하고 효자비가 내려졌다. 부인 박씨 역시 1888년에 정부인을 추증받고 효부정문이 하사되었다고 전한다.


Ο 청해 이씨 효자문(淸海 李氏 孝子門)

소재지 : 하점면 삼거리 923번지

강화 삼거리 청해이씨 효자정려는 1칸의 사당 앞에 세워놓은 이문위의 효자문이다. 조선 인조 2년(1624) 부친인 이중로가 강릉 방어사로 적을 막다 패전하여 자결하자, 평소 숙원을 지녔던 이수백이 시신을 인양하여 박해하였는데, 이를 본 이문위가 형과 함께 복수하였다고 한다. 이에 왕이 이문위가 죽은 후 제문과 함께 정문을 세웠다고 한다.

旌閭 孝子折衝將軍守忠淸道兵馬節度使李文偉之門 上之七年癸卯八月日


Ο 당산리 전의이씨 열녀

소재지 : 송해면 당산리 산45번지

열녀 전의이씨는 어려서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천성이 온화하며 법도를 익힌 가풍있는 집안의 규수라는 평판이 있었으며 양천허씨 가문의 허진에게로 출가 하였다.  부인은 남편과 금슬좋은 부부로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가던 중 남편 허진이 병으로 요절하자 지아비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던 전의이씨는 애통해 하며 남편 묘소  옆에 묘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한 후 지아비가 유명을 달리한 날 같은 시간을 잡아 자결하였다.

이씨부인의 이러한 정절은 조정에 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므로 그 높은 정절을 표창하고 열녀각을 세워 후세에 기리도록 했다.

열녀 전의이씨의 묘소는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산45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열녀각은 묘소옆에 위치해 있으며, 전면 1칸, 측면 1칸 으로 한식 맞배지붕 구조로 되어있다.

學生許璡妻孺人全義李氏烈女之門 光武九年乙巳三月日 命旌閭


Ο 주동량 효자문(朱東良 孝子門)

소재지 : 화도면 장화리 298번지

 

강화군 화도면 출신의 효자이다.  1885년 정문 하사 받고 화도면 장화리에 효자정문을 세웠다.

孝子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幸嘉春大夫同知中樞五衛將朱東良之門 上之二十二年乙酉二月日立 / 孝婦贈嘉善大夫工曹判書兼五衛都摠府副摠管朱渟爀妻贈貞夫人密陽朴氏之門 上之二十二年乙酉二月日立


Ο 고능리 효자정려

불은면 고능리 아침가리 마을에 있다.


Ο 두운리 평해황씨 효부정려

강화군 불은면 고능로 344번길 20

평해황씨1787~? 는 남편 고계인과 결혼 하였으나 집안이 빈곤하여 삯바느질로 연명 하였다.  시부모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원통하여 가사를 팔아 3년상을 지냈다.

문중에서는 평해황씨의 효생을 여러번 추천하여 1928년 효부로 표창받아 효부 졍려문을 세우게 되었다. 평해황씨의 묘소는 강화군 불은면 영모사 서쪽에 있다.


Ο 유성원 효자정문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518

유성원 선생은 조선 말기의 인물로 부모를 효도로 섬김에 있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묘소 앞에 묘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생활을 하였다. 고종 13년(1876)선생이 타개하자 그의 효행이 알려져 조정에서 효자정문을 하사하였다. 지금의 정실은 1989년 8월 복원되었다.


Ο 황운조(黃運祚)효자정문

강화군 길상면 선두4리

황운조(黃運祚,1730~1800)는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용(士用), 호는 오수(寤修) 이다.

정조(正祖) 시대의 학자이자 서예가로, 어려서부터 학문과 서도(書道)에 힘써 이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다.  윤순(尹淳)‧김상숙(金相肅)과 함께 강도삼절(江都三絶)로 불리었다. 1797년(정조 21) 왕명에 따라 『通監綱目(통감강목)』과 『춘추좌전(春秋左傳)』의 ‘綱(강)’을 써서 바쳐 가자(加資)되었다.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재직 중에 선행비(善行碑) 2기가 세워졌으며, 효행(孝行)으로 고향인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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