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12개)

Ο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93번지

고려시대에 세워진 5층 석탑으로 발견 당시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석탑은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지만 석축 주변에서 선문 및 어골문 와편, 막새기와, 청자편, 백자편 등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 수습되었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 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 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 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 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형태나 체감비율 등에서 변형된 고려 후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Ο 사인비구 제작 동종-강화 동종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부근리, 강화역사박물관 내)

강화 동종은 1711년(숙종 37)에 강화성문을 여닫을 때 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1711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의 거의 말년에 해당되는 거의 말년에 해당되는 숙종 37년(1711)에 제작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입상화문대에서 새롭게 변화시킨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연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 연뢰(蓮蕾)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중국 종 양식을 따른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명문을 새겼다.

이 종은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계승 하였던 사인비구가 그의 말년에는 이처럼 중국 종 계열을 따른 범종을 제작하였다는 점을 밝혀주는 자료이다.


Ο 강화 정수사 법당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258번길 142

신라 639년(선덕여왕 8) 회정선사가 세워 정수사(淨修寺)라고 했다. 조선시대 세종때 함허대사가 다시 지었는데,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淨水寺)라 고쳤다고 한다.

이 법당은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1957년 보수공사 때 1689(숙종 15)에 적은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세종 5년(1423)에 새로 고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물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 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면 퇴칸이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쪽 창호의 가운데 문은 어여쁜 꽃병에 연꽃과 모란을 꽂은 모습의 화려한 조각을 새겨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이 창살문의 창호 조각은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Ο 강화 전등사 대웅전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물로 전등사의 중심 예배공간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대웅전도 1621년에 지어졌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내부에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木板)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Ο 강화 전등사 약사전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약사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1876년(고종 13)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로 약사전의 지붕을 덮고 있는 명문 기와에서 1644년(인조 22)에 기와를 중수하였다는 이른 시기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Ο 전등사 철종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이 종은 1097년(북송 소성 4)에 중국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백암산(百巖山) 숭명사(崇明寺)에서 주조된 철제 종이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두 마리의 용을 갖추고 용 머리 주변에는 16개의 연꽃잎을 돌렸으며, 종의 몸체에는 위쪽에 8잎을 돌리고, 그 밑으로 여러 개의 옆 띠로 위아래를 구분한 다음 위아래 각 8개의 네모 구획을 마련하였다.

이 네모 구획과 구획 사이의 길쭉한 공간에는 명문(銘文)을 양각하였다. 종구(鍾口)는 중국 종에서 보이는 물결 모양을 이룬 듯한 8모로 되어 있고 그것을 따라 소문(素紋)의 구연대(口緣帶)를 돌렸다. 전체적인 형태는 개성(開城) 연복사동종(演福寺銅鐘)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종으로 중국제 철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명문(銘文) 중에는 이 종을 주조할 때의 시주인, 동역인(董役人), 장인 등의 성명이 양각되어 있다. 종의 크기는 높이가 1.64m에 입지름이 1m이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부평(富平) 병기창에 있던 것을 광복 후 독실한 불교신자에 의해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른 종이다.

전체적인 종의 형태가 웅장하고 소리가 청아하며 중국 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Ο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22

강화군 봉천산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불상으로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했는데, 현재는 전각을 지어서 그 안에 모시고 있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살이 올라 있는데 눈·코·입의 표현이 다소 둔중해 보인다. 귀는 비사실적으로 길며, 목이 짧아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신체의 굴곡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좁고 둥글게 처리된 어깨선으로 인해 불상은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 모습이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려 무릎 부분까지 표현되었는데 형식적이며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불신의 주위에는 2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몸광배와 머리광배를 구분하고 있다. 2줄 사이에는 드문드문 둥근 구슬을 새겨 넣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불상으로 모든 면에서 단순화, 생략화 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양감이 있는 얼굴,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Ο 강화 백련사 철조 아미타여래좌상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고려산로61번길 270

이 불상은 고려 후기에 유행한 단아한 양식을 따르고 있는 철조불상이다. 갸름한 얼굴, 단정한 눈·코·입, 좁아진 어깨, 손발의 곡선 처리 등은 절제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옷은 두껍고 주름은 단순한데 왼쪽 팔꿈치 윗부분에는 독특한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왼발은 옷 속에 감싸여 있고 오른발이 보이도록 앉은 길상좌(吉祥坐)의 자세이며, 배를 덮고 있는 옷의 띠는 매듭고리와 끈이 좌우로 균형 잡혀있다. 이러한 표현은 청양의 장곡사 불상 등과 비슷한 형식이다.

그러나 큼직하고 대담하게 묘사된 옷 장식이나, 왼쪽 종아리로 내려진 옷자락은 약간 다른 것으로 민천사금동불좌상 등과 매우 비슷한 형식이다. 길상좌 자세에 단아한 모습과 세련된 기법으로 보아 14세기 후반 내지 15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Ο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이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相好)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 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삼불좌상의 얼굴은 각각 독특한 상호를 보이고 옷주름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전등사 삼세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들 가운데 수화승 수연과 함께 서천 봉서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조성에 참여했던 성옥(性玉)의 조각적 개성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조각승들과 나타난 발원시주자들의 명단이 잘 전하여 불상(佛像), 면금(面金), 체목금, 체목, 오금(烏金), 좌대(座臺), 보단(甫團), 채안(彩安), 복장(腹藏) 등 세부적인 시주 항목이 기록된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Ο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 지정 : 보물
  •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이 삼존상 및 시왕상 등은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한 총 31구의 불상이다. 지장보살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에 수연(守衍)을 포함한 12명의 승려 조각가 12명과 신도 4명이 함께 불상 조성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저승세계인 명부(冥府)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보살이고, 시왕은 저승세계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이다.

불단 가운데에는 민머리의 지장보살이 앉아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미가 뛰어나다. 지장보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준다는 귀신의 왕인 무독귀왕이 있고, 왼쪽에는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이승에 돌아와 자신이 본 바를 세상에 알린 젊은 스님 모습의 도명존자가 서 있다. 양쪽 시왕상 옆으로는 시왕의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상 및 귀왕상과 녹사상, 동자상, 불교의 수호신인 인왕상 등 여러 권속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2010년과 2011년에는 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에서 불교 경전과 복장발원문, 후령통 등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수연의 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제1785호)보다 10여 년 이후에 제작된 불상으로, 수연 작품의 완숙된 조형미를 엿볼 수 있으며, 17세기 전반의 불상과 승려 조각가의 유파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Ο 강화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지정 : 보물
  • 소재지 : (23028)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고비고개로188번길 112 (국화리, 청련사)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단정하고 우아한 상호, 단아하고 세련된 조형미, 완급 조절이 잘 표현된 옷주름 등에서 세련되고 품격 높은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록 조성기나 중수기 등 불상제작과 관련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부드럽고 단아한 이국적인 얼굴, 분명하게 표현한 귀의 상·하각,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 왼쪽 가슴에서 늘어진 띠 주름과 어깨의 잘게 늘어진 주름 사이로 조그맣게 표현된 주름, 승각기를 돌돌 말아 단단하게 묶은 띠 매듭과 자락, 그리고 양 무릎에 수평으로 표현된 힘 있게 눌러 찍은 듯한 골깊은 주름과 오른 발목을 덮어 내린 넓은 ‘八’자 모양 띠 주름 등의 양식에서 13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가깝다.

이 불상이 갖고 있는 조형적, 양식적 특성으로 볼 때, 이르면 13세기 전반 늦어도 중반 사이에는 제작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불상은 타 지역에서 이운해 온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청련사의 주불로 예경되었던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몽골병란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1232년에서 1270년 사이에 개경의 수준 높은 조각 장인이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불상은 고려 불교미술이 추구했던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형적, 예술적, 종교적으로도 성숙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Ο 묘법연화경 목판

  • 지정 : 보물
  • 소재지 : (23050)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전등사)

전등사에 소장된 ‘『묘법연화경』 목판’은 중종 38년(1543) 마니산(摩尼山) 정수사(淨水寺)에서 성달생(成達生) 서체 계열의 인본을 복각하여 1판 4장의 형태로 조성한 것이다. 전체 105매 가운데 첫 부분인 변상(變相) 및 홍전서(弘傳序)로 구성된 1매가 결실되었고, 일부 목판에서 충해로 인한 훼손이 보이나 대부분의 경판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목판은 조선초기부터 16세기까지 성행되었던 성달생 서체 계열의 『묘법연화경』 가운데 시대가 가장 앞서는 목판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또한 각 권의 말미와 판면 광곽의 변란 밖에는 『중종실록』 등과 같은 관찬사서 등에서 확인되지 않은 수백 명의 시주질․연화질 및 각수 등이 새겨져 있어 16세기 중엽 정수사의 경판 조성과 관련된 역사상, 수록된 승려 등을 통한 불교사적 사실 등 다양한 역사․문화적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학술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보물로 지정하여 원천자료를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글 : 문화재청.강화군 / 사진:강화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