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개 강화의 돈대(갑곶돈대 부터)

Ο 갑곶돈대

  • 사적 제306호
  • 소재지: (23025)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룡길 26 (갑곳리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조선시대 강화도 해안에 돌로 쌓은 돈대 54개가 설치됐다.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채석 및 운반 등 준비기간을 포함하면 6개월)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과 가까워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 돈대이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이다.

그러나 현재의 갑곶돈대의 위치는 사실과 다른 구강화교 입구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주변에 면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간간이 보인다. 이 돈대 하부는 암반으로 되어 있어 돈대 설치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갑곶나루가 위치하고 있어서 김포의 문수산성과 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 활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남쪽으로는 강화전쟁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Ο 염주돈대

염주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한 돈대중의 하나로 전체 평면에 장방형 윤곽이 뚜렷하고 장방형 석재가 일부 노출되어 있으며, 문지 흔적이 보인다. 이 돈대는 염하를 향한 당산의 경사면에 축조하였으며, 포좌 부근은 삭토하여 평면을 이루고 있다. 돈대 후사면에 민묘 2기가 위치하고 바로 아래 해운사가 있다.

돈대를 찾아가려면 해운사 입구에 주차 후 우측에 목계단을 이용 5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된다. 현재 문화재돌봄사업단에 의하여 잘 정비되어 있다.

당시 돈대설치계획서(1679년 병조판서 김석주)에 의하면 “頂舊有治築 狀如周墻 今宜設直燉 北距制勝亭 南距甲串津 雜石在其傍 ” (예전에는 산 정상에 담장같이 쌓았지만 이제는 직사각형의 돈대를 설치한다. 이는 북쪽에 제승돈, 남쪽에 갑곶진과 연결되며 근처에 잡석이 많기 때문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Ο 제승돈대

제승돈은 염하의 수면과는 5∼7m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돈대는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돈대의 면석이 완연하였으나, 옥포제방이 수해를 입어 붕괴되었을 때에 제승돈·망해돈의 면석을 배로 운반하여 제방 축조에 이용했기 때문에 면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현재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땅에 묻혀 있는 면석 몇 개만이 보인다.


Ο 망해돈대

망해돈대의 면석은 제승돈대와 마찬가지로 옥포제방 축조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는다. 이 돈대는 다른 돈대와는 달리 외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성 내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수로를 통하여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Ο 옥창돈대

옥창돈대는 민가 후원에서 돈대의 하단부만 확인되었다. 형태는 약 45m 길이에 3단 높이로 현존하는 완만한 곡선의 석벽이다. 이 돈대는 경지 확장으로 인하여 멸실된 듯하다. 이 돈대 역시 망해돈대와 마찬가지로 외성의 내부수로 측면에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Ο 월곶돈대

월곶돈대는 한강 진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유도와 마주하고 있다. 남으로는 염하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조강을 통하여 서해로 진출할 수 있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50년전까지만 해도 매우 번성한 포구였다고 한다. 이 월곶포구는 동쪽으로 서울·남쪽으로 인천·서북쪽으로 연백 등지로 교통할 수 있는 요지 중의 요지였다.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수려한 경관으로 강화8경에 속하며 돈대 내부에 고려시대 자연경관을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연미정과, 수령 500년의 보호수 느티나무 2그루가 좌, 우에 있었으나 이중 한그루는 2019년 태풍 링링에 의하여 부러졌고 현재는 남아있는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돋아나 자라고 있다. 주변에는 삼포왜란의 명장 장무공 황형 장군의 사당이 있다 돈대 내부에서는 와편, 전돌 등이 다수 수습 되었고 6개의 포좌가 있으며 잘 보존관리 되고 있다.


Ο 휴암돈대

휴암돈대는 이곳으로 부터 강화외성의 시작 구간으로 현재 3∼4m 정도 석벽이 남아 있으나 인공시설물 설치로 인하여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Ο 적북돈대

추정 적북돈대지

적북돈대도 현지 인공시설물 설치로 인하여 원형이 완전히 교란되어 추정이 불가능하다.


 

Ο 낙성돈대

추정 낙성돈대지

낙성돈대는 숭뢰저수지 동쪽 제방 소로 부근이었던 듯 하지만 추정이 불가능하다.


Ο 숙룡돈대

숙룡돈대 지

숙룡돈의 면석은 해방 후 타지역 제방 축조에 사용되어 현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공시설물 설치로 인하여 심하게 교란되어 있다. 따라서 돈대의 형태 추정은 불가능하다.


Ο 소우돈대

소우돈대는 휴전 이후 인공시설물 설치로 인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Ο 빙현돈대

빙현돈대 지

  빙현돈대는 승천보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경작지로 되어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Ο 석우돈대

석우돈대는 일부 주민 사이에 빙현돈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듯하다. 지형 특성에 맞추어 전면은 면석을 사용하여 석축하였으나, 후면은 석축을 과감하게 감소시켰다. 형태는 반원형으로서 내부 중간에서 후면으로 한번 굴절하였기 때문에 전면에서 바라보면 의자 형상을 하고 있다.


Ο 천진돈대

추정 천진돈대 지

천진돈대는 현재 인공시설물 설치로 인하여 원형이 교란되고 현재 평지가 되어 있어 추정이 불가능하다. 석벽은 붕괴구간이 크며 포좌 부분은 현존하지 않는다.


Ο 철북돈대

철북돈대는 1.2미터 높이의 문지석이 폭 1.2미터 입구 양쪽에 현존하고 있다. 그 전면이 인공시설물을 설치할 때에 개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굴곡면을 이루고 있다.


Ο 의두돈대

의두돈대는 출입문이 위치한 후면이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기타 석벽은 대체로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포좌는 전면과 측면에 모두 3좌이다. 전면 포좌에서는 멀리 송악산이 바라 보이며, 측면 포좌는 해창리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계곡으로 침입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Ο 불장돈대

불장돈대는 강화 최북단 관방시설로서 예성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마주하고 있다. 석벽 폭은 교란되어 매우 불규칙하다. 형태는 기본적으로 방형이지만 전체적으로 지형을 고려하고 토압에 의한 붕괴를 방지할 수 있도록 곡선을 살렸다.


Ο 초루돈대

초루돈대는 무명돈대로 알려져 왔으나 2000년 육군박물관 조사팀에 의해 밝혀졌다.  다른 돈대와는 달리 낮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축이 긴 타원형을 형성하고 있고 동쪽과 북쪽의 석벽은 붕괴가 심하다.

포좌는 붕괴,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포구는 3구 중 2구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존 석벽은 7~8단 정도의 높이이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안으로 들여쌓는 퇴물림 방식을 택하였다. 남벽에는 여장 흔적이 일부 잔존하고 있으며 전돌 사용흔적도 보인다. 계룡돈대와 유일한 명문이 있다.


Ο 작성돈대

작성돈은 현재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돈대 중의 하나이다. 우측으로는 예성강 입구가 바라보이며, 좌측으로는 구등곶돈·광암돈을 거쳐 멀리 교동이 보인다. 작성돈·구등곶돈·광암돈 전면에는 개펄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어서 자연적인 방어시설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이 돈대 아래에는 조선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포대가 있다.


Ο 구등곶돈대

구등곶돈대는 지형이름에서 나타나듯이 거북이가 기어오르는 듯한 매우 특이한 지형에 설치되어 있다. 전면과 좌우 측면으로 개펄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어서 외적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석벽은 약10단 높이로서 위로 올라갈수록 들여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석벽은 동북 모퉁이가 붕괴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형태는 기본적으로 방형을 취하고 있으나 후면보다 전면이 넓어 이 역시 외적 방어와 관측에 용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겟다.

이곳에는 사선으로 사격할 수 있는 포좌가 설치되어 측면에서 전면을 지향해서 사격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돈대의 포좌가 석벽과 직각을 이루는 사격  뱡향을 이루는 것과 다르나. 이점 역시 관방상의 여러 요인을 감안한 설계라고 할 수 있다.


Ο 광암돈대

광암돈은 연안과 마주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개펄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어서 자연 방어시설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좌측으로는 교동이, 우측으로는 예성강과 개풍군이 보인다. 현재는 인공시설물에 의해 돈대 내부가 변형된 상태이다. 자연적으로 붕괴된 부분과 교란지역이 있기는 하여도 현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Ο 인화돈대

인화돈 남동쪽에는 교동과 연결되는 철탑이 있고, 그 하단에 범바위와 당집이 있다. 하단부 능선에는 연백군 망향비 및 누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민가 주택단지 조성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돈대 주변에서는 면석이 드물게 보인다. 돈대 부근에 인화보와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화돈 동남방향 아래에는 두께 50cm, 길이 15m의 패각층이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느티나무 사이로 퇴적되어 있는데, 패각층 최하부에 옹기편과 유리조각 등이 섞여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유작지로서는 그다지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화리에서 빗살무늬토기 산포지가 발견, 신고된 바 있기 때문에 향후 빗살무늬토기 유적과 관계있는 패총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충분이 있다고 사료된다.


Ο 무태돈대

무태돈대 부근에 교동으로 가는 창후리선착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항구가 폐쇄되어 어선만 접안되는 선창가 북편에 위치하며 현재 잘 복원되어 있다.

원형 구간은 문지와 포좌 구간 15m 뿐이고 기단부를 이용한 최근의 복원으로 석재의 교란이 있다. 따라서 현재 부분보수, 복원이 되어 있으나 원형을 참고하지는 않은 듯 하다.


Ο 망월돈대

망월돈대는 망월평야의 해안선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돈대는 평지 위에 설치된 것이 특이하다. 강화의 서북방면에 위치한 낙성돈과 마찬가지로 수로를 통하여 침입하는 적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시설인 듯하다.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로 무태돈까지 장성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Ο 계룡돈대

바다에서 본 계룡돈대계룡돈대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독립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돈대는 고지의 좌우 기저부를 보축하여 평탄하게 한 다음 일정한 높이로 석벽을 구축하였다. 동남방향의 외벽 좌측 모퉁이에서 어영군 명문이 발견되었다. 강화 돈대 중에서 명문이 발견되는 곳은 이 돈대와 초루돈대 뿐이다. 이 명문의 내용은 “강희일십팔년사월일경상도군위어영(康熙一十八年四月日慶尙道軍威御營)”이다. 여기서 강희 18년은 1679년(숙종 5)으로서 돈대를 설치한 해로 추측된다.


Ο 석각돈대

석각돈은 계룡돈에서 삼암돈으로 가는 도로 좌측 산중턱에 위치한다. 전면과 좌우면이 모두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돈대는 축조 위치가 산중턱이고 해안과도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 방어보다는 좌우 돈대와의 연락과 관측을 고려한 관방시설인 듯하다. 몇년전만 해도 석벽이 잘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기단석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Ο 삼암돈대

삼암돈은 전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안쪽으로 약간 후퇴한 넓은 대지에 터를 잡고, 후면으로는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있다. 삼암돈은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상단에 여장 흔적이 4m 가량 보인다.

석벽은 전체적인 지형에 따라 황줄눈의 높이를 맞추어 쌓았으며 석재 사이에는 그랭이질을 하여 맞닿은 면을 빈틈없이 하려고 했다.  상부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후퇴시킨 퇴물림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돈대는 포좌 4문이 남아 있으며 모두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바다를 향하여 포구가 열려있다. 포좌 내부에는 포탄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이방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포좌 내부에는 입구에서 안쪽으로 일정한 폭으로 들어가다가 포구에 근접한 곳에서 급격하게 포좌의 폭을 줄였다.

문으로 부터 우측 40m 지점에 돌로만든 누조(石漏槽)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토축에 스며드는 물을 배수시켜 토압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석누조가 현존하고 있는 돈대는 삼암돈·건평돈·굴암돈뿐이다.


Ο 망양돈대

망양돈대는 해안에서 돌출한 주변보다 높은 지형에 남향하여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외포리 항구가 있고, 남쪽은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다. 아래에는 삼별초기념비가 위치하고 있다. 이 돈대는 잘 복원되어 있다.


Ο 건평돈대

건평돈대는 해안선이 돌출된 곳에 위치하여 바다 쪽으로 시야가 잘 확보되고 있다. 돈대 전면은 거의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 지형이고 후면에는 바위가 많다. 이 돈대는 문지 및 그 좌우 석벽이 붕괴되었으나 부분 보수하여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이 돈대는 기본적으로 방형이지만 서북쪽의 전면 석축이 약간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직선 석축보다 외압에 잘 견딜 수 있는 구조적인 안정성을 고려한 것이다.

석벽 측면에 토축에 스며드는 물을 배수시키기 위한 누조가 설치되어 있다.  포좌는 전면 2좌, 좌우 츨면 각1좌 등 무두 4좌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은 지형을 고려하여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충분한 시야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좌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폭을 줄였으며. 그 내부에는 포탄 등의 수납 공간인 이방이 있다.  2018년 포구 밑에서 불랑기 1개가 출토되어 현재 강화 전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Ο 굴암돈

 

굴암돈은 반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석벽 하단이 정돈되어 있는 반면 상단이 조잡한 편이다. 주변에 기와편과 조개무지가 발견되고 있다. 2020년 현재 부분 보수공사를 마쳤다.

포좌는 서쪽 바다르 향하여 4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폭이 줄어드는 형태이지만, 그 정도는 다른 돈대에 비하여 적은 펴이라고 할 수 있다. 돈대 내부 바닥이 매몰된 관계로 포좌 입구의 바닥 높이가 높아졌다. 포탄 등을 수납할 수 있는 포좌 내부의 치방은 없다.


Ο 송강돈대

송강돈대는 굴암돈대와 선수돈대 중간 엠마누엘 선교원 우측 구릉에 위치한다. 현재 터와 기단석 몇 개만 확인될 정도로 무너져 내렸으며 소루지돈대, 송강포돈대로도 불린다.


Ο 선수돈대

문화재 자료 제10호

선수돈대는 송강돈대에서 장곶돈으로 향하는 굽은 도로 좌측 산 중턱에 위치한다. 이곳을 통과해서 마니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이 돈대는 잘 보존되어 양호하다.

이 돈대는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49돈대 중 하나로, ‘송강돈대’라고도 불린다. 일부는 둥글게, 일부는 각이 지게 쌓아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반달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검암돈대가 있고, 북쪽으로는 굴암돈대가 있는데, 이 돈대와 굴암돈대는 관아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강화유수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았다.


Ο 장곶돈대

장곶돈대는 매우 돌출된 지형에 설치되어 있고 남쪽에는 개펄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으며 산을 등지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관측과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돈대는 대체로 현지 석재를 사용하여 1993년에 보수하여 현존 상태가 양호하다.

40∼120cm의 네모난 돌을 3m 높이의 둥근 형태로 쌓은 후, 해안을 향해 4개의 포좌(포를 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포좌는 지름이 45cm, 안의 너비가 18cm, 길이가 24cm의 크기이다. 그 위로는 낮은 담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건립한 것으로, 미곶돈(彌串墩), 북일곶돈(北一串墩), 검암돈(黔岩墩)과 함께 장곶보에 소속되어 있었다.


Ο 북일곶돈대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미루지돈대·장곶돈대·검암돈대와 함께 장곶보에 속했다. 방형 구조로 둘레 122m, 석벽 높이는 130~350㎝이다. 시야각이 매우 넓어 경계 초소로서 탁월한 위치이다. 한편 북일곶돈대 안쪽으로 건물지가 있다

지리적으로는 돈대 뒷편에서 내려온 산능선이 해안선과 만나는 높은 곳에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서쪽은 해안선과 거의 접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좌우측 역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지형은 조금 넓은 편이다.


Ο 미루지돈대

미루지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축조 당시의 이름은 미곶돈대이다. 마을 이름이 미루지인데, 동네 지형이 바다 쪽을 바라보면 다락방에 앉은 모양 같다고 해서 미루지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북일곶돈대·장곶돈대·검암돈대와 함께 장곶보에 속했다. 원형 구조로 둘레가 116m, 석벽의 높이는 120~230㎝이다. 다른 돈대와 달리 출입문이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돼 있다.

양쪽으로 만곡된 갯벌이 펼쳐지며 해안선이 매우 돌출되어 있는 끝부분의 산봉우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문에는 별도의 돌을 사용하여 문둔테 홈을 만든 것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문둔테 홈은 출입문 상단 개석에 만든다. 미곶돈은 일부 붕괴되기는 했어도 대체로 현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Ο 송곶돈대

송곶돈대는 조선 숙종 5년 (1679) 3월 승군 8,000여명과 어영군 4,000여명을 투입하여 80일 만에 공사를 끝냈으며,  갈곶돈대 별장에 잠시 배속되었다가 진무영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돈대 내부에 건물을 두어 창고와 수직(守直)하는 병사의 숙소로 삼았다

현존 상태가 불량하다. 문지 입구에는 경작지가 있고 전면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다. 포좌와 문지는 기단부만 확인될 뿐 완전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서쪽으로는 흥왕어촌계 가무락 양식장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채석장이 있다.

해발 10m의 비교적 낮은 구릉에 위치하는 돈대로서 서쪽 바다로의 조망은 매우 좋은 위치다. 서편의 최하단의 기단부를 제외하고는 석재가 모두 유실되어 보존상태는 좋지않다. 평면형태는 정방형으로 각 면의 길이는 31m이며, 남아있는 토축으로 미루어 남·북·서벽으로 각각 1문의 포좌가, 동벽에 출입문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Ο 분오리돈대

분오리돈대는 현재 복원되어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이 돈대는 동쪽으로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석축함으로써 절벽화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지형 지물을 잘 활용한 결과이다. 이 돈대는 현재 매우 특이한 외형을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이 돈대는 뒷산에서 해안으로 돌출되어 나온 산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해 있는데, 좌우로는 깊게 만곡된 갯벌을 이루고 있는 포구를 끼고 있어서 가시범위가 상당히 넓다. 초승달 모양의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 역시 지형에 맞추어 석벽을 축조한 결과인 듯하다.

분오리돈대에서 북측으로 동막해수욕장과 너른 갯벌이, 남쪽으로는 인천시내가, 동쪽에는 천연기념물 저어새 변식지 각시여 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강화도 관광 1번지로 꼽힌다. 특히 겨울철 노을과 낙조의 명소이기도 하다.


Ο 갈곶돈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47~3번지에 위치하며 일명‘칠온지돈대’라고도 불리는 갈곶돈대는 터만 확인되고 면석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다. 소수의 기와편·백자편만이 확인된다.

선두포의 갯골을 방어하기 위해 양암돈대와 마주보는 위치에 축조하였으나, 숙종 32년(1706) 선두포 제방이 축조되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1718년 폐기시켰다.

토축의 형태로 보아 동서간 35m, 남북간 15m의 장방형 돈대였으며, 동향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Ο 양암돈대

양암돈은 현재 사유지로 내부에는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전면과 측면은 모두 붕괴되어 기단석만 보인다. 포좌 추정은 개석의 현존 상태로 가능할 뿐이다. 후면에 좌우 기둥석이 현존하고 있어 문지 확인이 가능하다.

갈곶돈대와 함께 선두포의 갯골을 방어하기 위해 갈곶돈대와 마주보는 위치에 축조하였으나, 숙종 32년(1706) 선두포 제방이 축조되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1718년 폐기시켰다.


Ο 후애돈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3호

후애돈은 1998년에 복원되었다. 특히 이 돈대는 염하 부근의 복원돈대와는 다른 여장을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여장은 부분적이기는 해도 미곶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면에는 바다, 인공시설물과 경작지로 둘러싸여 있다. 내부 계단이 남아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현재 폐교된 길상초등학교 선택분교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 돈대를 훼손하면 화를 입는다.”는 전설이 마을에 전해왔기 때문에 부락 수호를 위한 신단처럼 보호되어 현재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다.


Ο 동검북돈대

동검북돈은 54개 돈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현재 석벽은 모두 붕괴되었지만 토축과 면석의 확인은 가능하다. 서남쪽 하단에서 건물지 2곳을 발견하였다. 여기서는 서남방향에 위치한 영종도를 볼 수 있다. 현재 인공시설물 설치로 인해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한때 봉화대로도 사용했었다.


Ο 택지돈대

택지돈은 선두리 택이마을에서 섬암돈으로 가는 도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돈대는 평지화되어 추정이 불가능하다.  한때 후애돈대와 문화재 명칭이 바뀌어 불리다가 2008년 바로잡아 현재에 이른다.


Ο 섬암돈

섬암돈은 현재 사슴목장을 변해 있으며, 전면에는 간척지로서 경작지가 되어 있다. 해방 후 제방을 만들면서 면석을 모두 활용하였기 때문에 현재 평지이다. 기와편·도기편·옹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Ο 장자평돈

장자평돈은 현재 정미소가 위치하고 있어서 원형 추정이 불가능하다.


Ο 초지돈

사적 제225호

조선 효종 7년(1656)에 강화도와 강화해협의 수로 방비를 위해 구축한 요새인 초지진(草芝鎭)이 있던 곳이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강화전적지 보수정비사업 때 초지돈대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초지진의 진사와 주요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초지돈대는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 m 되는 타원형의 돈대인데, 내부에는 3군데의 포좌(包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으며, 조선시대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Ο 덕진돈

덕진돈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 중 하나이다.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기도 하다. 신미양요(1872)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할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으며 장방형 이다.


Ο 손돌목돈대(손석항돈대)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m2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일부 손석항돈대라고도 부른다.


Ο 용두돈대

강화도는 고려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시되었으며, 조선 숙종 5년에 돈대가 세워졌다. 용두돈대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된 상태이며 문화재로 보호받고있다

복원된 1977년 당시에는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용두돈대 바로 아래로 흐르는 염하강 손돌목의 물결은 강화 8경으로 아름다운 비경을 볼 수 있다.


Ο 광성돈대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조선 숙종 5년(1679)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80일만에 완공하고 1977년 강화 전적지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돈대안에 사거리 700m 정도의 대포(홍이포) 사거리 300m 정도의 소포, 그리고 프랑스군들이 사용하던 발랑기가 전시되어 있다.


Ο 화도돈대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서쪽에는 새로이 쌓은 이질적인 석축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의 돈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돈대지 남서쪽에 화도수문개축비가 있다


Ο 용당돈대

용당돈대는 조선 숙종5년 1679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49개 돈대중 하나로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소속되어 있다. 돈대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북서와 남동방향은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돈대는 4개의 포좌가 설치되었으며 내부에는 돈사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남아있다.


Ο 좌강돈대

좌강돈대는 용진진 관할하에 있던 돈대로 용진진과 성벽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효종 7년에 썋았으며 중영우부좌사의 중앙 초소로 돈대 면석이 1~2단 남아있던 것을 1999년 용진진과 함께 복원 정비하였다. 평면 형태가 원형이며 서쪽으로 출입문이 있고 동쪽으로 포문이 배치되 있다.

또한 이 돈대는 수로 측면의 매우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수로를 따라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듯하다.


Ο 가리산돈대

가리산돈대는 돈대를 형성하는 토축의 흔적과 강화 외성과의 연결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돈대에서는 출입구의 위치와 포좌 1좌의 위치가 확인된다. 내부는 현재 평탄하며 서쪽 하단에는 돈대를 축조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집결되어 있다.

 출처 : 강화군, 강화도의 국방유적[육군박물관], 강화의 돈대[강화문화원], 워키백과
사진 : 강화로닷컴